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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행(4)

미니멀리스트로 살아간다는 것(5)

by 소방관아빠 무스

세 번째 날 아침에 일어난 우리는 즉흥적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있는 '비자림'에 들렀다가 그 근처에 있는 만장굴에 가 보기로 했다. 그리고 공항으로 가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 '용눈이 오름'이라는 지명이 보였다.


'그래, 제주에 왔으면 오름에 한번 올라봐야지~'


우리는 뭐에 홀린 것처럼 버스에서 내렸다. 언덕도 아니고, 산도 아니고, 오름이란 걸 말로만 들었는데 정말 어떻게 생긴 것인지 한번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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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본 용눈이 오름)


그런데 가까이 갈수록 구름에 덮인 게,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오름은 한라산에 붙어 있는(?) 기생화산이라던데 정말 꼭대기가 분화구처럼 생긴 게, 저 안에서 금방이라도 뭐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점점 가까이 가니 오름 아래쪽 풀밭에서 웬 말들이 뛰놀고 있는 게 아닌가?


KakaoTalk_20250915_110350479_13.jpg (임자 없는? 말)


분명 누군가 저기다 풀어놓고 방목을 하고 있는 거겠지만 근처에 아무리 찾아봐도 주인이나 울타리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제주에서 야생하는 야생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 이곳의 태곳적 자연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런 곳이라면 평생 목동으로 지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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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제주의 자연)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저 오름을 올라갔다가 다시 비자림에 갔다가, 만장굴까지 보려면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았다. 우리는 얼른 오름에 올라갔다. 그런데 오름에 올라가는 도중에 소나기를 만났다. 우산을 챙겨가지 않았던 우리는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하고 뛰어내려왔다. 하기야 우산이 있다고 해도 막을 만한 비가 아니었다. 제주의 비바람을 실제로 겪어보니 그랬다. 겨우 뛰어내려오니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제주를 스쳐가는 거대한 구름이 잠시 내린 비였다. 그래서 오름 위에서는 그렇게 세차게 느껴졌는데 구름이 지나고 나니까 어느새 비가 그친 것이었다. 오름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제주의 거대한 자연을 잠시 느낀 순간이었다. 우리는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닦은 후 다시 비자림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 비자림까지 가는 길 중간에서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님이 만장굴은 지금 내부 수리 중(?)이라 갈 수 없다고 했다. 좀 아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신 비자림을 제대로 즐기기로 했다. 비자림이란 이름은 어쩐지 비밀스런 숲이라는 의미 같아서 호기심이 느껴졌다.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길래 비자림이라고 했을까?,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비밀스런 비(秘) 자가 아니라 비자나무 비(榧)였다. 즉 비자나무가 많은 숲이라는 뜻이었다. 내 예상과 달라 좀 실망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비자나무가 그렇게 많다니 한번 가볼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자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이번 기회에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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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의 비자나무들)


천년의 비자나무가 모여있다는 비자림은 정말 엄청났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신경세포들로 이어진 신비의 나무숲을 걷는 느낌이었다. 나무들이 땅속에서 뿌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나만 한 것일까? 피톤치드 냄새가 은은하게 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온몸을 뒤덮듯 감겨오는 그 숲 속에서 비가 내리다 그치다를 반복해서 더욱 좋았다. 태고의 원시 자연 안에 들어선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난 내 신발을 벗었다. 여기서 맨발로 걸으면 요즘 유행하는 황톳길 맨발 걷기의 백만 배쯤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천 년간 비자나무의 잎과 열매와 가지가 떨어져 만들어진 원시의 맨땅을 걷는 느낌이라니... 내리는 빗물에 그것들이 뒤섞여 걸쭉하게(?) 버무려진 그 길을 나는 파트라슈가 아니라 내 영혼의 단짝인 중학교 때 친구와 함께 걸었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이 뭔들?


KakaoTalk_20250915_110350479_02.jpg (길 중간에 만난 음수대, 수천 년의 미네랄이 내 몸속으로?~)


길 중간에 만난 음수대에서 지구의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 수천 년 이어온 땅속의 미네랄이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지구와 인간, 그 억겁의 순환계를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지구가 더러워지면 내 몸도 더러워진다는 생각을 사람들은 왜 못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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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비자나무 연리지, 비자나무 숲길, 새천년 비자나무)


비자림을 걸으며 비자나무 연리지도 만났고 수령이 거의 천년이 다 됐다는 새천년 비자나무도 만났다. 하지만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비자나무 숲길이었다. 그 길을 한번 걷고 나니 매년 여름마다 나를 괴롭혔던 지긋지긋한 무좀이 한방(?)에 날아가 버렸다. 왜 그랬을까? 심지어 그때 그 길은 비가 내려 바닥은 눅눅하다 못해 끈적끈적한 흙길이었는데 말이다. 혹시 그 수천 년 동안 쌓이고 썩은 비자나무 잎과 열매가 그 흙들과 함께 빗물에 녹아들면서 천연의 무좀약(?)으로 내 발가락 사이에 스며들었던 것일까?


왜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 하나는 인간이 자연 속에 있을 때 가장 건강하고 행복한 상태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연을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미니멀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에너지를 조금 덜 사용하고, 음식을 조금 덜 먹고, 우리의 환경을 조금 더 보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어머니 같은 지구의 자궁 안에서 먼 태곳적처럼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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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의 토양과 비자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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