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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마살 Jan 23. 2020

직업병이 생기다

이상한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나의 하루는 피피티 슬라이드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슬라이드 콘텐츠 미팅, 피피티 슬라이드 제작, 만든 슬라이드 공유하고 미팅, 슬라이드 수정.... 프로젝트 리더는 하루가 미팅으로 돌아가겠지만 (우리가 만든 슬라이드로 미팅, 파트너들과 미팅, 클라이언트들과 미팅...) 우리는 그의 미팅들을 back-up 하기 위한 슬라이드들을 만드느라 새벽까지 슬라이드를 생산해 내야 했다. 


내 첫 슬라이드를 본 프로젝트 리더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생각을 해 보면 웃음이 난다. 삐뚤빼뚤 못생기고, 글씨 많고, 이 색 저 색 다 가져다 사용한 슬라이드. 회사 피피티 매크로 사용법도 몰라서 (분명히 트레이닝 때 배웠으나 눈으로 슬라이드 만들기를 배워놓고 그걸 기억해서 실제로 활용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오바 아닌가) 만드는데 시간도 오래 걸린 내 슬라이드는 정말 별로였다. 그 슬라이드를 보고도 '이상하다' '이게 뭐냐' 기죽는 말 한마디 안 한 우리 프로젝트 리더에게 감사하다. 내게 뭐라고 지시하는 대신 그는 나를 우리 팀 슬라이드 마스터 컨설턴트에게 보냈다. 


'밤에 차 한 잔 하자고 하면서 슬라이드 들고 호텔 방에 찾아가라'는 굉장히 구체적인 제안.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슬라이드 마스터 컨설턴트에게는 내게 슬라이드 제작 코칭을 부탁 해 놓고 나에게 지시 같은 제안을 한 것이었다. 암튼 나는 슬라이드 덱을 들고 컨설턴트의 방에 찾아갔다. 그녀는 내게 'slides for inspiration' 영감을 위한 슬라이드라는 이름의 덱을 메일로 보내주고 현란한 매크로 스킬과 슬라이드 제작 시 중요한 팁들을 알려 주었다. 그렇게 나는 주변 사람들의 코칭을 받으며 서서히 변태같이 슬라이드 만드는 것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하루 종일 슬라이드를 만들고, 고치고, 하는 작업이 (눈알이 빠지고 어깨가 아픈 것만 빼면) 나름 좋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직업병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상대에게 얘기하는 도중에 자꾸 머릿속으로 이 얘기를 제대로 하려면 어떤 구조의 슬라이드가 좋을까를 떠올리기도 하고, 식당 메뉴가 줄이 잘 안 맞으면 매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일상생활에서도 오타를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식당 메뉴 설명에서 오타를 찾아 식당에 말해 서비스를 받기도 했다. 


슬라이드 없이 미팅을 하는 것이 허전하고 이상한 느낌이 든다. 아마존은 슬라이드 제작에 쓸데없이 시간 쓰지 말라는 취지에서 피피티를 아예 사용하지 않고 오직 워드로만 소통한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는데 과연 피피티와 워드, 어떤 것이 더 효율적 일지 생각해 볼 만한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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