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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용담 Aug 17. 2020

조바심이 나지만 가장 좋은 때를 위해 기다려야 하는 것

< 리틀 포레스트: 겨울과 봄 >


설탕을 넣는 건
팥이 손가락으로도 쉽게 으깨지고 나서다.
그전에 설탕을 넣으면
아무리 쪄도 팥이 물러지지 않는다.
조바심을 내는 건 금물이다.

-이치코 < 리틀 포레스트: 겨울과 봄 >-








자식 키우는 것만큼 조바심 나는 일이 하늘 아래 또 있을까.
나는 내가 낳은 자식이 잘 자라지 못할까 봐 늘 조바심이 났다.
그렇지 않아도 나의 선택에 자신이 없는 나로서는, 자식을 기르며 해야만 하는 무수한 선택들 앞에서 늘 조바심으로 우왕좌왕했었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말에 너무 쉽게 현혹이 되었고, 그들의 평가에 너무나 쉽게 무너져 내렸다.

큰애가 다섯 살 때, 아파트 단지 내에서 파라솔을 펴고 학습지 홍보를 하던 사람들에게 사탕과 연필이 함께 들어있는 홍보용 학습지를 한 권 받았다. 큰애 나이를 묻고는 이 정도 단계는 풀 수 있어야 한다며, 집에 가서 풀려 보고 관심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집에 들어와 큰애를 앉혀놓고 문제지를 풀게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반타작도 못하는 큰애 뒤통수를 바라보며 '아! 저 아이는 나를 닮아 수학에 정말 소질이 없나 보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날 밤엔 잠도 잘 안 왔다.

분명 그 사람이 이 정도 단계는 풀 수 있어야 한다고 했기에, 난생에도 처음 본 그 사람 말에 그 정도도 거뜬히 못 푼 내 아이의 인생은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다음날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그 사람은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아~제가 그 단계를 드렸나요? 좀 높은걸 드렸네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웃기는 이야기다. 고작 다섯 살짜리의 학습지에 인생을 점쳤었다니...
아이 다섯 살에도 그러했으니 그 이후의 조바심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또 둘째 아이의 사춘기를 감당해 내지 못하였다.
별로 사춘기 같은 것을 겪지 않은 나는, 둘째 아이가 '사춘기'라는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며 잘 자라고 있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무슨 대단한 사고를 치는 것도 아닌데, 그저 눈빛이 좀 사나워지고 말투가 퉁명스러워지며 공부에 집중을 잘 못하는 행동들이 나의 조바심에 부채질을 해댔다. 그래서 그 어린것을  '조기유학'이라는 멍에를 지워 외국으로 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땐 애들이 다 커 버린 건 줄만 알았다...)

부모가 되면 약해진다.
부모가 되고 나면, 어떤 면에 있어서는 모든 부모가 비슷해지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각자가 가진 학력, 직업, 나이, 배경 등이 부모라는 타이틀만 달아 주면 어딘가 모르게 귀퉁이가 뭉툭해지는 게, 어쩐지 객관성이 없어지는 듯도 하고,  나도 모르던 또 하나의 캐릭터가 생겨나는 기분이다.
남의 자식에게 말할 때는 그토록 냉철하고 객관적이던 사람도 자기 자식의 일 앞에서는 판단력이 흐려지고 감정이 이성을 앞설 때가 많다.
늘 침착하고 이성적이던 사람도 자기 자식에게는 조바심으로 타 들어가는 마음이 숨겨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팥이 물러지기 전에 설탕을 넣으면 안 되는 것을 몰랐다.
빨리 넣어야 팥이 물러지는 동안 설탕이 스며들어 더욱 달콤하고 풍미 있는 단팥 소가 되는 줄만 알았다.
맛있는 단팥 소를 만들고 싶었다.

누가 만든 것보다 더 맛있고 보기 좋게, 어느 음식에 넣어도 맛있는 단팥 소 덕에 그 음식이 살아나는, 최고의 단팥 소를 만들고 싶었던 거다.
그 조바심은 자식이 시간을 두고 푹 삶아질 동안을 기다려주지 못하게 만들었다. 쉴 새 없이 들여다 보고, 국자로 휘젓다가 급기야는 손으로 눌러보지도 않고  설탕을 부어 버렸다.

힘들었겠다.
나의 조바심을 먹고 자라느라 많이 힘들었겠다, 내 자식들.
성급히 부어버린 설탕 같은 나의 조바심 속에 그래도 푹 물러 단팥이 되어준 내 자식들이... 새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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