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뀌었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유난히 많던 작년.
사면초가, 진퇴양난, 고립무원 같은 암담한 한자성어들로 대변 가능한 시간들을 견디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아무 일없어 보였다.
남의 눈에 비친 나는, 각자 자기만의 안목으로 편집되어 걱정 없고 평화롭고 고상하기까지 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나의 마음속에서는 해소되지 못한 감정들이 언어화되지 못한 채 자음과 모음으로 덜그럭 거리며 쌓여가고 있었다.
살기 위해 글을 썼다.
사람을 붙잡고 내 이야기를 하는 것엔 재주가 없으니, 그저 혼자 앉아 상한 마음을 글로 앓았다.
냉동실 속 정체 모를 까만 봉다리들을 풀어헤치듯 마음속에 얼어붙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글로 풀어내었다.
이젠 그만 버려도 좋을, 꽝꽝 얼어 언제 내 발등을 찍을지 모를 무기 같은 기억의 봉다리는 충분히 녹여 눈물로 흘려보내고, 아직 쓸만한 것들은 귀한 재료로 쓰임 받을 날을 위해 살피고 보듬어 소중히 보관해둔다.
글이 넘치는 세상이다
언젠가부터 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플랫폼이 늘어나면서 단순한 글쓰기를 넘어 출판까지 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아졌다.
아침에 눈뜨면 시작되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들이닥치는 읽을거리와 정보들의 양이 어마 무시하다.
독자인 나의 수준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읽으면서 이해하려 애써야 하고, 때론 피로감을 느끼게도 하는 전문적인 글들, 글밥이 지나치게 긴 글들도 참 많다.
긴 글의 기세에 눌려 짧은 글은 왠지 '어디 내놓기에 좀 모자란 내 새끼'같은 느낌이기도 하지만, 어떨 땐 '과연 이 글은 독자를 위한 것인지 작가의 만족을 위한 것인지' 곱씹게 되는 글들도 만나게 된다.
활자가 넘치는 이 판국에, 나까지 글을 써서 보탤 이유가 진정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글쓰기의 르네상스 같은 이 시절에 나는 무슨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것일까.
미용실에서 머리에 파마를 말고, 소파에 다리 꼬고 앉아 침 발라 넘겨가며 읽는 잡지 같은 글.
애쓰지 않아도 술술 읽히는 글.
가끔, 마음의 어떤 꿈틀거리는 감정을 설명하고 싶은데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적당한 표현 방법을 모르겠다가, "맞아 맞아! 내가 하고 싶던 말이 바로 이 말이었어!" 하며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글.
'나만 이러는 건가' 싶어서, 혹시라도 들킬까 봐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을 때, "뭐야! 나만 그러는 게 아니었잖아!" 하며 안도할 수 있는 글.
어떤 장소에 대한 개념적 설명이나 구체적 정보 대신, 그 장소만이 가지는 냄새며 분위기, 공기와 소리까지 상상해 보게 되는 글.
오토리버스 되는 일상 속에서 너무 작은 부분이라 마음과 눈길을 주지 않던 것들, 그 하찮은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어 지게 만드는 글.
불 끄고 누웠지만 잡념으로 어지러운 마음에 잠 대신 펼쳐 들었다가, '네 마음 나도 잘 안다'라는 토닥임을 만나게 되는 글.
이 사람은 어떤 운명을 살았길래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글쓴이를 좀 더 이해하고 싶은 글.
살다가 문득 한 구절쯤 생각나는 글.
그래서 결국, 마음이 따뜻해지고야 마는 글.
그래, 나는 이런 글을 쓰고 싶어 오늘도 글을 쓴다.
짐승이 제 상처를 혀로 핥듯, 글쓰기가 가진 치유의 힘을 빌어 내 감정을 핥으려 글을 쓴다.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 상한 마음을 들여다 보아주려, 약한 나를 안아주려 글을 쓴다.
대단할 것 없는 인생이지만, 미약함 속에 녹아 있는 진부하리만큼 평범한 삶의 진리를 발견하는 희열로 글을 쓴다.
전문적인 글과 정보성 글들은 토 나오게 많은 세상이니, 나는 그저 제 마음 하나도 잘 모르겠어서 힘이 듦에 대한 글을 쓴다.
온통 앞서가는 사람들의 시커먼 뒷통수에 지레 헐떡이다 힘이 풀린 두 다리같은 마음을 위해 글을 쓴다.
나의 글이 누군가의 마음 한 귀퉁이 따뜻하게 만져 줄 수 있다면, 읽을거리 많은 이 세상에 내 글을 보태도 될 유일한 이유라고 믿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