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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용담 Mar 09. 2021

타이틀 홀더(Titleholder)

존재감


외출했다 돌아오니 식탁 위에 유기농 주스 한 박스가 놓여 있다.
윗집에서 가져왔다는 그것에는, "세 살 아이가 있어요. 항상 조심하고 있지만 혹시 너무 시끄러우면 연락 주세요."라는 내용과 개인 연락처를 적은 손글씨 메모가 붙어있고, 아이 엄마 것인듯한 명함 한 장이 같이 들어 있다.
이미 메모에 연락처를 적었음에도 동봉한 명함이 요샛말로 T.M.I(Too Much Information)라고 생각됨과 동시에, 내포한 의미를 알 것만 같아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 엄마는 박물관에서 연구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고상한 분야의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니 아이로 인한 이웃의 피해가 없도록 힘써 노력할 인격일 것이라는, 근거 없으나 설득력 있는 기대감이 들었다.
명함으로 연상되는 이미지와 전하고 싶은 속내가 합의를 이루는 느낌이랄까.

그녀가 의도한 것이 그것이었다면 바로 적중했다!

세 살 아래인 여동생이 요즘 부쩍 퇴직을 하고 싶어 한다.
대학교 졸업하던 해부터 불혹의 후반인 지금까지, 한해도 쉬지 않고 직장을 다녔으니 징그럽기도 하겠다.
듣기 좋은 꽃타령도 한두 번인데, 매일 가족 단톡 방에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하는 동생에게 어느 날 한마디 톡 쏘고 말았다.
생활비를 벌러 다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 그만 두지 못 할 이유가 전혀 없구 왜 허구한 날 징징대는 거냐고...
그때 동생이 꺼낸 속엣말이 마음에 남는다.

돈도 돈이지만 사실, 직함을 떼어 낸 자기 자신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한다.
지금껏 가진 직함이 본인의 정체성이었기 때문에 그걸 떠나면 자신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고 불안하다는 거다.
듣고 보니 직장을 그만두고 말고의 단순한 문제가 아닌 한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한 고뇌서, 그렇게 살아보지 못한 내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거였다.

나도 사실 나 자신을 대변할 타이틀의 부재가 부끄러웠다.
이런저런 모임을 시작할 때 흔히 나누는 '자기소개'시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업으로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언제부터 직업이 사람이 되었나 씁쓸하면서도, '나는 이런 사람이오~'라고 단칼에 규명할 무언가가 내게 없음이 더욱 씁쓸했었다.
직업을 말하면 한 문장으로 끝날 자기소개를, 이러쿵저러쿵 풀어 설명하는 게 모지리 같고 구차하게 느껴져 이름 석자만으로 심하게 압축을 해 버리던 '자괴 소개 시간'.
그럴 때 윗집 아이 엄마의 고상한 명함이나 말하면 딱 알아들어 주는 동생이 가진 직함 같은 것이 무척 갖고 싶었다.

계절이 한 바퀴 돌아 다시 꺼내 입은 옷이 있다.
뒷목이 간지러워 자꾸 손이 가고, 까칠까칠 걸리적대길래 벗어서 확인해보니 브랜드명이 적힌 상표택이다.
작년에도 같은 이유로 이 옷이 불편했던 생각 났다. 가위를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했던 기억과 확 잘라 버리지 못했던 이유 함께.

생긴 것에 비해 값을 제법 주고 산 옷이었다.
그냥 보면 평범한 티셔츠 같아 보이는 그 옷을 산 이유는 오로지 브랜드 네임밸류 때문이었다.
그 옷의 정체성은 나를 힘들게 하는 상표택에 있었다.
그걸 없애버리면 그 옷의 가치를 설명할 길이 없어서 간지러움을 감수했던 옷, 감히 잘라낼 수 없는 어떤 '권위'같은 것이 상표택에 들어 있는 듯했다.

한 해를 묵혀, 다시 가위를 집어 들고 생각한다.
옷에게 당하는 괴롭힘을 참아야 할 만큼, 내가 인정하는 나의 가치가 이 옷보다  낮았다니...
내 손은 어느새 잘라버린 상표택의 촘촘히 잘도 박아 놓은 가장자리 실밥을 한 올 한 올 풀고 있었다.

한 사람에게, 인생의 중요한 것들이 모여  만들어진 어떤 타이틀, 직함, 자리의 가치는 얼마나 큰 의미가 될까!

BTS 노래 제목 '피 땀 눈물'의 총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태리 장인처럼 한 땀 한 땀 만들었기에 더욱 잘라 내기 힘들 명품 같은 생의 들!
뒷목을 괴롭히는 그것을 쉽게 떼지 못하는 동생을 보면서 이름 석자만 가지고도 꿋꿋이 살아가는 내 형편이 갑자기 다행스러웠다면 너무 극단적인 합리화일까?

얼마 전 또 한 번의 자기소개 시간이 주어졌다.
다른 모임과 다를 바 없이, 모인 사람들의 직업을 순식간에 알게 된 그 자리에서 나는 예전과 다른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 저는 현재 직업을 가지고 있진 않고요, 자녀들을 다 키워 놓았어요. 온갖 무용( 無用) 한 것들을 좋아하고, 그것들로 글 쓰는 것을 즐깁니다...."
이름 석자만 가지고도 나를 설명할 오만가지 방식이 있다는 걸 동생이 알게 되면 좋겠다.
세상에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직함보다 더 멋진  수식어들이 준비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좋겠다.
직장이라는 테두리 밖이 결코 낭떠러지나 황무지, 무료함으로 밀폐된 공간이 아님을 알게 되면 좋겠다.

지금 앉아있는 '자리'에만 고정된 시선을  돌려  이미 가진 다른 이름의 타이틀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상표택을 떼어 낸  옷을 입어 본다.
어우~살 것 같네!
진작 떼어 버릴 것을...
옷은 옷인 걸로 충분하고, 우리는 그저 우리 자체로서 충분하다.
각양각색의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이미 타이틀 홀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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