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수 있으니 좋구나!
초보 작가의 <글 써보니 좋은 점>
어디론가 가고 싶은 날이 있다.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거나 바람이 모차르트 음악처럼 부드러워서, 창 밖 풍경 속으로 몸을 담그러 휙~ 떠나고 싶은 날.
또 다른 의미의 어디론가 가고 싶은 날이 있는데, '휙~'이 아니라 '확!'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그런 날이다.
어디론가 확! 사라져 버리고 싶은 날이 있었다.
징글징글 말 안 듣는 애들도 꼴 보기 싫고, 손하나 까딱 안 하는 남편도 짜증스럽고, 그 꼴을 담아서 처리할 내 마음의 공간이 꽉 차서 터질 것 같은 날, 내일은 내 기필코 날 밝는대로 이놈에 집구석을 탈출해 보리라 비장한 각오를 했었다.
밤새 뒤척이며 만든 상상 속의 나는, 이미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어딘가 우수에 잠긴 여자가 되어 작은 여행가방 하나 달랑 든 채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날이 밝았다.
'나 없이 알아서들 해보라지'하며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는데, 일단 애들 학교를 보내고 남편 출근을 도왔다.
양심상 '요것만 하고 나는 간다' 했는데, 여기저기 아침의 흔적들이 눈길을 잡아, '빨래만 돌리고...'로 수정했다.
빨래 돌리는 동안 청소기도 돌렸고, 애들이 돌아와서 먹을 간식은 준비해 두고 나가야 할 것 같아 뭐 좀 만들고.
뒷정리하다 보니 세탁기가 울어대고, 빨래를 널다 보니 가족들 저녁 먹거리 걱정에 찌개 하나 끓이고...
젠장... 벌써 시간은 정오가 다 되어 가고, 나는 이미 운전을 하기 싫을 만큼 지쳐 있었다.
아... 가족들 잠들어 있을 때 튀었어야 했어...라는 교훈을 얻은 채, 전의를 상실한 나는 그냥 동네 친구와 커피 마시며 수다 떠는 걸로 '어디론가 확!'의 일탈을 대신했었다.
나는 일탈이 힘든 사람이다.
남들은 술마시고 노래하면 기분이 좋다던데, 술을 마시면 다음날 머리 아플게 걱정 되고, 듣기만 하던 노래는 부를 선곡부터가 스트레스다.
목적 없이 돌아다니거나 괜한 것을 사는 것도 별로이고,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다.
게다가 체력도 저질이라 방전이 되면 충전시간이 한참 걸리는 오래된 배터리의 소유자여서, 에너지 쓰는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이런 나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다.
" 그럼 스트레스를 뭘로, 어떻게 풀어요?"
"그러게...? 난 뭘로 스트레스를 풀지...?"
작년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억압과 무시로 일관해 온 내 마음에 쌓인 것들을 풀어내 보려 하나씩 둘씩 글로 써서 글쓰기 플랫폼에 올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내 '일상의 소중한 탈출구'가 되었다.
할 말 많은 날엔 글밥이 많은 글로, 차마 말로 하지 못할 이야기들은 내가 허락지 않으면 누구도 들을 수 없는 글로 쏟아 낼 수 있다.
마음 둘 곳이 없다 느껴질 땐, 아무도 없는 빈 화면 속으로 도망쳐 숨는다.
내 마음을 알아 주네 못 알아 주네, 누군가를 향한 구질한 기대 또한 접어 버리고, 그 심연 같은 공간에 내 못나고, 아프고, 휘청거리고, 창피하고, 숨기고 싶은 마음을 글로 퍼붓는다.
적절한 단어와 표현을 고르고 골라 글을 쓰는 동안, 처리되지 못했던 마음이 뜨거운 욕조에 담근 몸처럼 노글노글해지고 하나로 엉켜있던 감정들은 각각 제 이름을 찾아간다.
답답한 마음이 때를 민 듯 뽀얗고 말개지고, 마침내 어렴풋 희망 같은 것도 수증기처럼 피어오른다!
조금 전 저녁을 먹다가 '어디론가 확!' 사라지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머릿속으로 떠날 고속도로를 고르는 대신, 얼른 글쓰기 창을 열고 화면 속 나만의 세계로 휙~ 들어오면 된다.
지금 내가 이놈에 집구석을 확! 나와버린걸 아무도 모른다.
'탈출'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