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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용담 Mar 17. 2021

그때는 맞고 지금은 ...모르겠다.



봄기운에 이끌려 동네를 크게 한 바퀴 걸었다.
운전하느라 앞만 보고 오갈 땐 있는 줄도 몰랐던 별거별거 다 파는 가게들을 구경하며 느린 걸음으로 산책을 했다.

오전과 오후 시간의 경계를 그렇게 걷다 보니 슬슬 출출한 시장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구운 빵에, 며칠 전 선물로 받은 코코넛 잼을 발라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식빵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빵이 팔릴 시간답게 매대에 여러 가지 빵들이 빼곡했다.
식빵만 모아 놓은 진열대에도 다양한 종류가 충분한 개수로 놓여 있었는데, 그 와중에 유일하게 달랑 하나만 남은 것을 집어 들었다.
계산대에는 나와 같은 것을 고른 젊은 엄마가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와 함께 앞서 계산을 하고 있었다.


토종 효모.
내가 그 식빵을 고르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문구이다.
이 엄마도 어쩌면 그 단어에 마음이 끌렸을까 혼자 상상하다가, 불현듯 묵은 기억들이 빵처럼 부풀어올랐다.

아이들 키우면서, 먹거리를 선택할 때 가장 신경 쓴 건 '원산지'였다.
국산,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이 심고 거 둔 것들.
혹시라도 중국산이 구미호처럼 재주넘어 둔갑하지는 않았나 뒤집어보고 잦혀보며 까다롭게 고른 토종.
생선도 내 나라에서 가까운 바다 출신의 것을 선택하고, 고기도 한우를 선택해 먹이려 애쓴 이유는 몸과 땅은 하나이니 제 나라 것이 체질에 가장 잘 맞는다는 '신토불이'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유독 언어에 대하여는 '먼 나라'것이 었까.
몸에는 토종의 것들을 넣어주면서 어찌하여 머리엔 가보지도 못한 타국의 언어 채워지길 바란 것일까.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언제부터 다른 나라의 언어, 특히 영어에 대해 달뜬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

'내가 만일 영어를 한마디도 쓸 필요가 없는 직업을 갖게 되면 엄마 어쩌려고 그러냐'는 6학년이던 아들의 반항기 가득한 질문에, 반격할만한 대답 거리를 찾지 못해 면박으로 입을 막아버렸던  생각이 난다. 먹을 거 입을 거 참아가며, 자식을 위한 희생자 코스프레는 부담스럽다는 말대꾸가 억울했지만, 플러스가 많이 달린 한우고기를 매일 먹을 수도 있을 만큼의 돈과 바꾼 영어학원이 결코 '맹목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아들을 굴복시킬 실질적 증거는 들이댈 수 없었으나, 그 어떤 증거보다 무서운 '혹시라도'가 내포한 모호함이 포기할 수 없는 '목적'이 되어주었으니까.


자녀교육에 대한 뚜렷한 주관이나 정립된 가치관이 없었기에, 교육에도 분명 존재하는 유행이나 열풍, 대세에 실려 불안한 마음이 부평초처럼 떠다니던 간들이었다.
나의 미련함과 무지함이, 부족한 정보력이, 게으른 채근이 '혹시라도' 내 아이의 미래에 후회스러운 원인이 될까 봐.
더 솔직히 파고들자면, 먼 훗날 '혹시라도' 원망의 화살이 고스란히 내 심장에 꽂힐까 봐 무서웠다.


'다 너를 위한 것들'이라는 눈물겨운 이름으로 보듬기에도 모자랄 시간들을 닦달하고, 통제하며 억압했던 시간들.

그 당시 '대세'이던  '조기유학'의 열풍을 타고, 어른이 되기도 전에 엄마인 나와 떨어진 내 아이들을 바라보며, 운이 좋은 거라고,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잔인한 시간들.

내 아이들은, 미래에 행복하기 위해 매일이 행복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땐,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맞았다...


그때는 맞던 것들 지금은 틀리다고 할 수는 없다.

내 과녁을 비껴갔다고 남의 화살의 방향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으니.
다만, 이런저런 원리를 앞세워 가늠하고 대비했던 앞으로의 일들이 참 신기하게 요런조런 상황을 만나 예상을 벗어나더란 말이다.
걱정과 불안으로 써 내려가던 '혹시라도'의 시나리오가 실상으론 일어나지 않은 것이 허다했음을 경험해오며, 잠 못 이뤘던 밤들이 참 부질없었음을 이젠 알지만, 혹여 빵을 계산하고 있는 내 앞의 젊은 엄마가 고개들 돌려 내게 자식 교육을 물어온다면 과연 나는 어떤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느낀 '부질없음'에 대한 이야기는 해주지 못할 것 같다.

지금 다시 아이를 키운다 해도 여전히 나는,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혹시라도'의 욕심이 만드는 부질없는 짓을 또 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때는 분명 맞았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나이가 들 수록 점점 더 모르겠다, 아이를 잘 키우는 일은...


내 앞, 빵 사는 엄마 옆에 서있는 아이를 바라본다.
'토종 효모'로 만든 식빵 먹고 너도 영어 학원에 가야겠구나.
이름도 알지 못하는 아이의 뒤통수를 따뜻한 눈빛으로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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