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기가 막힌 성능의 알람이 있다. 우선 매우 정확하고, 배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끄는 기능이 없어서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알람을 끄게 되어 못 일어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특이한 점은 오직 나만을 위한 알람이라는 점과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올 때까지 깨워준다는 것이다. 다만 단점이라면 내가 원하는 시각을 세팅할 수 없고 딱 한 번의 시각, 새벽 4시 30분으로만 세팅되어 있다.
이 신박한 기능들이 탑재된 알람은 바로 내가 키우는 고양이 '가지'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새벽 4시 30분이라는 시각이 가지에게 세팅이 된 걸까? 내 발치에서 함께 자는 녀석은 그 시각이 되면 어김없이 '엄마옹'이라는 소리를 내어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내 귀에는 늘 엄마옹이라고 들린다^^)
새벽 4시 30분이라는 시각은 더 잠을 자도 깨어나도 둘 다 이상할 것 없는 랜덤의 시각이지만, 그런 만큼 의식의 경계도 모호해서 한밤중보다 더한 졸음이 밀려오기도 하는 시각이기도 하다. 처음에 가지 알람이 시작되었을 땐 가지의 '엄마옹' 신호를 무시한 채 조금 더 자겠다는 표현을 온몸으로 하며 돌아누웠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자기 울음에 반응하지 않으면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이나 소소한 물건들을 앞발로 톡톡 쳐서 낙하시키는 수법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새벽의 적막을 깨뜨리며 딱! 또는 퍽!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그 물건들을 수습하기 위해 나는 등에 스프링이라도 달린 듯 튀어 올라 일어나야만 했고, 나를 일으켜 세움에 성공한 녀석은 나를 부엌 싱크대 앞에 놓인 자기 밥그릇 앞으로 유인하고는 뺨으로 밥그릇 가장자리를 밀며 달그락 소리를 냈다.
그래.. 어서 밥 조금 주고 들어가 나머지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밥을 부어 주고 다시 침대로 들어가곤 했는데, 언젠가부터는 그냥 돌아서는 나를 가로막고 본인이 식사하는 것을 지켜보라고 냥냥 대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먼저 그랬던 것 같다. 새벽에 끌려 나와 밥을 주고 나서, 밥 먹는 가지 모습을 보면 낮 동안 혼자 잠만 잤을 녀석이 측은하기도 해서 밥 먹는 녀석의 등을 괜히 쓸어주고 말을 걸고 그랬다 내가......
순진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생명체에게 책임지지 못할 행동을 하면 안 된다... 나의 감정 이입으로 만들어 놓은 습관에 장기적인 책임을 질 수 없으면 애당초 시작을 말아야 한다.
그 상대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동물에게는 더더욱...
요즘은 가지가 다른 방에서 자곤 했었는데 새벽 4시 30분이 되면 어김없이 그분이 오신다 내게. 자박자박... 나도 새벽에 눈뜨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지 먼저 깨어 거실을 가로질러 내게로 오는 그분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 날이 많다. 자박자박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한다.
음... 철학자 칸트 가지님이 오시네.. 4시 30분이구만.
가족들은 나에게 '고양이 버릇을 드~럽게 들여놨다'라고 한다.
네가 잠을 푹 자야지 고양이 시중드느라 새벽잠을 설치는 게 말이 되냐고 한다. 나도 나의 새벽잠이 억울하고 수면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하루도 빼먹지 않는 가지 녀석의 성실함과 밥으로라도 위장하여 나를 깨워 놀고 싶은 그 본능을 도저히 모른척할 수 없으니! 처음엔 새벽마다 녀석이 배가 고픈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내가 발견해 낸 점은,
녀석은 내가 일어나자마자 밥부터 주지 않고 일단 화장실을 들르고 물 한 잔을 마시는 등 다른 행동을 하면 밥달라는 것을 멈추고 나와 동선을 함께 한다는 것이다.
시험 삼아 밥을 주지 않고 책상에 앉아 책을 읽어보았더니 내 옆에 가만히 앉아있다가 잠이 드는 것 아닌가!
녀석은 배고픈 게 아니었나 보다. 그저 자기에게 각인된 본인만의 루틴을 성실하게 따랐을 뿐....... 머리가 띵했다.
뭐지? 나는 녀석의 습관 이행의 한 도구였던 것인가.....? 오냐! 그렇다면 이제 나도 너를 이용해야겠다.
이렇게 확실하게 깨워주는 알람을 그냥 무시한다는 건 뭔가 큰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었고 그때부터 나만의 새벽 루틴을 만들기 시작했다.
차를 한잔 만들어 마시고, 책상에 앉아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고, 어제 읽던 책도 읽는다.
물론 다시 침대로 기어드는 날도 있고 생각의 늪에 빠져 아무것도 못한 채 동이 트는 날도 많지만 그렇게 그렇게 나만의 습관을 만들어 가고 있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남을 당했다. 어둠 속에서 끈을 흔들며 가지와 잠깐 놀아주는 걸로 내 성실한 알람에게 고마움을 대신했다.
양치를 했고, 뜨끈하게 차를 한 잔 마셨고, 책을 읽었다. 그리고 오늘은 글까지 쓰는 덤을 얻었다.
힘들고 짜증 났던 오랜 시간 동안의 새벽 4시 30분, 그리고 하루도 쉬지 않고 온몸으로 나를 일으켜 세운 가지의 성실한 알람. 이제 가지는 세상에 둘도 없을 나의 '책 읽어 주는 남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