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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용담 Jun 21. 2020

수종사 삼정헌



양평에 위치한 수종사라는 절에 다녀왔다.
지인이 그 절에 있는 다실을 소개해 주셨는데 꼭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었다.

아무 스케줄 없는 평일 오전, 하루 여행을 위해 준비한 건 요즘 즐겨 듣는 '최유리'라는 가수의 노래들과 텀블러에 내린 캡슐 커피 한잔 그리고 약간의 간식거리다.
네비에 수종사라고 찍어 넣고 평일의 한가로운 외곽순환도로를 여유롭게 달렸다.

여러 곡의 노래가 지나가고, 여러 개의 터널을 지나고 나니 어느 순간인가부터 줄곧 오른쪽 옆구리에  일렁이는 강물을 끼고 달리고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윤슬만큼 내 마음도 반짝였다.

한참을 달려 이제 거의 도착했겠다 싶을 때쯤 수종사라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그 이정표와 네비가 동시에 가리키는 방향으로 차를 틀었을 때부터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길이 시작되었다.

아스팔트 아닌 시멘트 도로가 넓지 않은 폭으로 놓여 있었는데 곧 나올 줄만 알았던 절은 낌새도 없고 구비구비 기나긴 도로만 계속되었다.
도로는 점점 스키장 슬로프 고급자 코스만큼이나 급한 경사로 이어졌고 더 이상 이정표도 나타나 주지 않았다.


아... 이러다가 차가 홱 뒤집어지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엑셀레이터를 힘주어 밟는 발끝에  내 불안도 함께 실렸다.

아기처럼 살살 다뤄졌던 자동차는 누가 자기 등짝이라도 밟는 것 마냥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울음소리를 냈고 얼마큼 더 올라가야 절이 나오는지 짐작도 안 가는 길을 하염없이 올라갔다.
그때 거짓말처럼 갑자기 일주문이 나타나고 그 옆으로 차를 세울 수 있는 평지가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주차를 한 후 내려 보니 걸어서 가야 하는 길이 또 삼백 미터쯤 남아있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가파른 자갈길과 흙길을 번갈아 걸어 올라갔다. 수목원에라도 와 있는 듯 울창한 숲길을 온갖 새소리 들을 음미하듯 들으며 천천히 올라갔다.



길모퉁이를 돌자 절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반 바퀴 옆으로 돌리니 아... 그림 같은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남한강과 북한강의 두 물이 만난다는 두물머리 전경이 수묵담채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내게 이 진귀한 걸 내놓으려 그리도 구불구불 오랜 길로 나를 데려왔구나!! 길게 올라온 가파른 길의 이유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수종사는 조선의 7대 임금인 세조에 얽힌 설화가 있다. 세조가 오대산에 가서 지병을 치료하고 오다가 이곳에 들러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밤에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세조가 그 종소리를 따라가 만난 토굴에서 18 나한상을 발견했고,  이 자리에 절을 지어 수종사라 했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나는 수종사 자체에 관심이 있어 온 것은 아니었다. 불교신자도 아니었기에 불심으로 시작한 길도 아니었다. 그저 궁금했던 건 수종사에 있다는 '삼정헌'이라는 다실이었다.

언젠가부터 어느 장소에 가기 전에 미리 검색하는 행위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미리 다 알고 가서 보는 장소는 내게 '사진에서 본 것과 똑같구나'라는  적반하장의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수종사도 주소 외에  아는 것이라고는 무료 다실이 있다는 게 전부였기에 가파른 오르막도 그 끝에 맛본 한강 조망도 더 크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절 마당으로 들어서서 삼정헌부터 찾았다.
경내에 목탁 소리와 함께 불경 외우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고, 기도시간에는 다실 개방을 안 한다는 안내문을 목에 두른 채 삼정헌은 닫혀 있었다. 11시 30분이면 기도 시간이 끝이니 잠시 기다리기로 하고 주변 경관을 조용히 느껴보았다. 평일 오전의 절내는 정말 절간같이 조용했다.



시간이 되었는지 푸른 옷을 입으신 분이 삼정헌의 창호지 문을 여셨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들어가니 몇 분이냐고 물으셨다
저 혼자입니다 라고 말씀드린 후  뜨거운 물이 든 보온병 하나를 받아 들고 맨 끝 벽 쪽 자리에 앉았다. 옆으로 난 창 밖으로 아까 본 한강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정갈한, 너무도 정갈한 찻상이 내 앞에 있었다.
뜨거운 물을 숙우에 따라 다관과 찻잔을 덥히고 퇴수기에 물을 따라 냈다.
찻잎을 한 스푼 다관에 넣고 숙우에 따라 식혀 둔 물을 부어 녹차를 우렸다.
가까스로 수줍은 연둣빛을 낸 첫번째 찻물이 찻잔에 채워진다.
아ᆢ 정말 좋다ᆢ정말 너무나 좋다ᆢ



모든 장면이 슬로 모션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이 공간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본다는 건 왠지 불경스럽게까지 느껴져서 나는 그냥 가만히 앉아있기로 했다.
오른쪽 창 밖 먼 곳으로는 한강이, 바로 옆 창가로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보였다.
왼쪽에는 열어 둔 창호지 바른 여닫이 창문 밖으로 맞은편 절의 기와가 액자처럼 걸려있다.
그대로 신선이 될 것만 같았다.


몇 번 더 우려낸 찻물은 점점 짙은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찻잔을 비워낼수록 몸은 따뜻함을 지나 뜨거워지고 있었고, 기분 좋은 땀이 송글 맺히고 있을 때쯤 다실을 지키고 계시던 분이  조용히 내 쪽으로 걸어오셨다.

이제 그만 나가야 할 시간인 걸까ᆢ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분이 내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혼자 오시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혼자 오기에 쉬운 곳은 아닌데, 여기까지 오셨으니 난향을 맡고 가시게 하고 싶네요. 복난인데 향이 정말 짙었답니다. 지금 끝물이지만 그래도 향이 남았으니 한번 맡아보셔요 "
라며 내 뒤에 있는 줄도 몰랐던 난 화분을 꺼내 내 코에 대어 주신다.

아... 정말 아름다운 향이었다!! 파우더 향같이 포근한 향이 코를 지나 가슴 안으로 쑤욱 들어왔다.

가슴으로 스민 향은 눈물이 되어 나왔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귀한 선물을 주시다니요..."


차를 다 마신 후 뜨거운 물을 다관에 부어 다관 안에서 몸을 불린 찻잎을 퇴수기에 비워냈다. 사용한 찻잔은 굽을 잡고 찻잎으로 컵을 닦았다.
퇴수기에 버려진 찻잎과 물을 마련되어 있는 더 큰 퇴수기에 비워내고 사용한 찻상을 정리한 후 갈 채비를 했다.
일어서는 나를 보시고 내려가는 길이 가파르니 반대편 층계로 조심히 내려가라고 안내해 주셨다.
감사하다고ᆢ 조만간 다시 오겠다고 깊이 허리 숙여 인사를 나누고 알려주신 계단으로 절에서 내려왔다.


마음이 너무 따뜻해졌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차 있구나...
내 눈이 가리어져 보지 못할 뿐 이 세상은 참 아름답고 살아봄직 하구나...


내가 만일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의 번뇌를 지니고 다실에 앉아 있었더래도 그분이 내미신 난향을 대하는 순간에  문득 살고 싶어 졌을 것 같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얼마나 간사하고 나약한 건데... 죽을 듯 괴로웠다가도 불현듯 힘이 나는 건 사실 누군가 건넨 아주 작은 무언가였던 적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얻어 마신 따뜻한 차가 그러하고 내가 얻어 맡은 난향이 그러하다.

내가 여기서 느낀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전달이 될 수 있을까 생각을 했다.
아니, 애초에 전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닌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말해 주고 싶다.
그 공기를, 풍경을, 찻상을, 찻잔을, 찻물을, 난향을...
그 온도를, 스며듬을, 눈물을, 감사를, 가득 채워짐을...

이런 충만함이 내 안차곡히 고여 좋은 기운을 발하는 사람이기를 바라본다.
꽃향마저 기꺼이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견고한 사람이기를 바라본다.
내 가슴에 스며든 난향처럼 조용하지만 강하게... 그렇게 말이다.


사는 동안, 내가 내민 마음 한 조각으로 어느 사람 헝클어진 마음을 빗어 줄 수 있다면 나를 살아있게 하신 신께 최소한의 목숨값은 하는 것이리라...


자주 생각날 것 같다.
그리고 자주 찾아가게 될 것 같다.
삼정헌의 사계절을 다 볼 수 있게 되기를 또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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