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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용담 Jun 24. 2020

일단 데친 후



친정 동생이 막 결혼했을 때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유튜브도 없던 시절이니, 새댁이 되면 으레 요리책 한 권쯤은 필수로 사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친정에서 만난 동생이 정말 웃기는 이야기를 했다. 요리책들이 너무나 황당하다는 거다.
시금치무침을 하고 싶은데, 데치는 법을 몰라 요리책을 샀는데, '일단 데친 후'라는 말로 레시피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난감한 것은 '갖은양념을 넣고 무친다'라는 설명이라고 했다. 갖은양념이란 게 도대체 뭐냐고 말갛게 묻는 그 애를 바라보며 엄마와 나는 어떻게 저런 것을 모를 수 있을까 싶어 박장대소를 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동네 친한 동생과 증권회사를 다녀왔다.
그녀의 남편이 어디서 얻어들었는지 갑자기 모기업 주식을 사라고 했다면서 나에게 같이 가 줄 것을 부탁했다.
사실 그녀나 나나 살살 돈 쓸 줄만 알았지 돈을 불리는 일에는 관심도 재주도 없는 부류이다. 그런 여자 둘이서 마트에 콩나물 사러 가듯 주식을 사러 갔다.
마침 도착한 게 점심시간이었는지 몇 개 되지도 않는 창구는 텅 비어 있고, 직급이 있어 보이는 여자분 혼자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건 말건 제법 많은 사람들이 번호표를 뽑아 들고 있었고 혼자 남았던 그 직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무슨 업무를 하실 건지 물어왔다.
증권계좌를 하나 만들러 왔다고 서둘러 대답했다. 우리가 무얼 하러 왔다고 설명할 만큼의 지식도 없는 사람들이라, 주식을 해 봤다는 어떤 여자에게 증권회사 가서 뭐라고 말해야 하냐고 물어 얻은 모범답안을 잊어버릴세라 서둘러 답을 한 거다.
"아... 계좌 개설만 하실 거면 비대면으로 하셔도 돼요~" 직원분의 대답에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저희가 주식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요~ 직접 설명을 좀 듣고 싶은데요"
"그러시면 아래층 은행 가셔서 계좌 만드셔도 되거든요! 지금 모두 식사를 하러 가서 오래 기다리실 것 같아 권유드리는 겁니다."
점점 난감해졌다. 은행에서도 만들어 준다고?
하지만 계좌를 만들었다 해도 우린 주식 사는 법은 여전히 모를 텐데... 그녀의 남편은 오늘 꼭 그 주식을 사라고 했기 때문에 이대로 물러갈 수는 없었다.
"도와주실 수 있을 때까지 좀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금융기관에 와서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다 생각하며 앉아 있었다.

시간이 좀 흐르고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남자 직원이 왔다.
우리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그 직원도 아까 여자분과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가만 보니 두 직원 모두 '이렇게 간단한 일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거'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하는 뉘앙스였다.
그래... 증권회사 업무의 가장 초입 과정인 계좌 개설이 날고 기는 그들에게는 먹던 껌일 것이다. 스마트폰에 앱을 깔고 거기서 하란 대로만 하면 되는 단순한 것을 왜 못하겠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시금치 데치는 법을 모르는 것을!!
일단 데친 후 그다음 공정부터 이야기해 주는 요리책을 쓴 사람도 설마 시금치 데칠 줄 모를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그리 썼겠지?
우린 남자 직원에게 우리의 무지함을 계속 피력했다. 데칠 줄 모른다고... 데칠 물 한 번 끓여본 적 없다고...
그제야 친절하게 문자로 URL을 보내주고 앱을 깔아 증권계좌 만드는 것을 끝까지 도와주었다.
비로소 우리 폰 화면엔 증권사 앱이 떡하니 떠있고 그녀의 남편이 사라는  주식을 살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남도 알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내가 안다는 이유만으로 남도 당연히 그 정도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당위성이 상식인 듯 통할 때가 많다.
모르는 것이 죄가 아닌데, 몰라서 요리책을 산 거고, 우리처럼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전문가가 필요한 건데,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창피하고 뭔가 많이 잘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기본을 무시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기본이 있어야 진전이 있다.
'안다 치고'의 지식 전달은 듣는 이를 더욱 난감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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