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도끼 같은 아들이 있다. '토끼'를 '도끼'로 잘못 쓴 거 아니다. 도끼 같은 아들 맞다. 중2 때 한국을 떠난 녀석은 미국을 거쳐 지금은 프랑스에 있다.
워낙 일찍부터 녀석과 자주 떨어져 봐서인지 서로 먼 거리에 사는 것이 남들의 상상만큼 힘들진 않다. 녀석이 군대에 갔을 때도 난생처음 자식과 떨어져 보는 부모들은 안달복달이 나던데, 우린 비행기 안타고도 갈 수 있는 거리에 서로가 있다는 것 만으로 위로가 되는 담대한 마음이었다.
우린 자주 언쟁을 벌인다. 지난 달 카톡으로 결론도 안 나는 대화를 치열하게 이어가다가 녀석에게 카톡에서의 최고형인 '차단'을 당했었다. 어버이날인데도 연락이 없던 녀석에게 내심 괘씸을 느끼고 있는데, 시차 때문인지 저녁에 카톡이 왔다. 어버이날 특사란다...
그 녀석은 어려서부터 워낙 말을 잘하더니 머리가 커질수록 빛나는 언변을 자랑했다. 그 언변은 주로 나와의 말싸움에서 더욱 찬란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비싼 돈 들여 시킨 과외 수업에서 내준 숙제를 성실히 하지 않길래, 본전 생각에 길길이 날뛰며 내가 그랬다. "너 이런 식으로 숙제도 대충 하고 수업받을 거면 과외 끊어버릴 거야! 끊자, 끊어버려! "
난 녀석에게 무얼 기대하고 그런 말을 던졌을까? -아니에요 엄마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정말 잘 할게요 과외는 계속하게 해주세요...?
과외 끊겠다는 나의 엄포에 묘한 웃음을 싱긋 웃더니 나가려고 신발을 신으며 그런다. " 나는 끊을 수 있는데.. 엄마가 끊을 수 있을까? 내가 과외 안 해도 엄마 정말 괜찮겠어?"
녀석이 한 말을 곱씹어 보다가 머리가 띵했다. 녀석의 말이 맞았다... 효과도 없는 그 과외를 지속하게 했던 것은 자식을 위한다는 허울 뒤에 가리어진 내 불안이었다...
옷을 사주러 쇼핑몰을 갔을 때다. 내 눈엔 다 비슷한 청바지구만 녀석은 기가 막히게 신상품만 콕 집어서 마음에 든다고 했다. 녀석의 마음에 드는 디자인은 가격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가격으로 이월 상품 2장을 사면 딱 좋겠다 싶어서, 신상 바지보다 이월 상품이 내 눈에는 더 예뻐 보인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그냥 이거 비싸니까 싼 거 사라고 말해 엄마! 엄마가 이 바지를 안 사줘서 화가 나는 게 아니고, 가격이 마음에 안 드는 걸 마치 이 바지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돌려 말하는, 엄마의 말 하는 방식이 화가 나..."
아... 머리가 쩡! 한다. 그랬네. 나도 모르게 그런 식의 화법을 사용하고 있었네...
녀석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신발을 채 벗기도 전에 " 잘 다녀왔니? 어서 손 닦고 뭐 좀 먹어~ 그리고 숙제하고 놀아라~"부터 시작해서 녀석의 다음 과정 또 다음 과정을 끊임없이 채근 했었나 보다.
저녁밥을 먹고 식탁에 앉아 잠시 멍 때리고 있는 내게 녀석이 갑자기 "엄마! 저녁을 먹었으면 빨리 상을 치워야지 뭐하고 있어! 얼른얼른 설거지를 해야지~" 갑자기 짜증이 확 올라왔다. 여태 저녁밥 하느라 서성이다가 밥 먹고 나니 나른하고 움직이기 싫은데 녀석이 옆에서 채근하니 뱃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거였다.
"엄마 잠깐 앉아서 쉬었다가 할 건데 오늘따라 너 도대체 왜 그러니??' 그때 녀석의 대답... "엄마도 짜증 나지? 엄마는 나한테 매일매일 이렇게 한다고...." 하아... 머리에서 또 쩡 소리가 났다.
중학생 되면서 나한테 유독 말이 짧고 퉁명스러운 녀석이 어느 날 자기 친구와 통화를 하는데 그리 다정할 수가 없었다. 깔깔 웃으며 아주 상냥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길래 내가 물었다
'너는 친구들한테는 그렇게 다정하면서 엄마한테는 왜 다정하지 않아?" "내 친구들은 나를 화나게 하지 않잖아...' 맞네...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을 했구나 내가...
녀석과의 에피소드는 이런 것들 말고도 수도 없이 많다. 언쟁은 항상 나의 참패로 끝이 났다. 내가 너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자가 되어 녀석의 입을 막아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어쩐지 궁지에 몰려 '너 몇 살이야 인마'로 몰아붙이는 나이만 많은 꼰대 노릇 같아 하고 싶지 않았었다.
말대답이라는 단어로 치부하기에는 내게 큰 울림이 있는 말들이었기에 그 말대답을 존중하기로 했었다.
녀석의 말대답은 내 닫힌 사고방식을 열고, 내 '얼어붙은 바다' 같은 고정관념을 내리치는 '카프카의 도끼'가 되어 내가 끝까지 붙잡고 싶었던 녀석과의 정신적 탯줄을 조금씩 끊어 내었다.
난 녀석의 도끼질이 좋다. 내 왜곡된 모성애를 깨부수고, 내가 볼 수 없는 나를 보게 해 주며, 무수히 깨져야 하는 얼어붙은 나의 사고를 내리치는 도끼질이 난 참으로 기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