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햇볕이 좋은 날이었다. 피아노 학원에 다닌 지 얼만 되지 않은 때여서 학원 가는 길은 설레었다. 이날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갔던 터라, 기억이 더욱 또렷하다.
학원에 가보니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선생님께서 새로 온 친구이고, 나보다 한 살 어린 여섯 살이라고 했다. 그 아이가 입고 있던 예쁜 원피스부터 눈에 들어왔다. 소매 부분에 살짝 볼륨이 있었고, 레이스로 장식까지 되어 있었다. 가지런했던 앞머리, 반 묶음 머리에 큰 리본핀을 하고 있었다. ‘소공녀’에 나오는 소녀들 복장이었다. 끈적한 손, 얼룩이 묻은 티셔츠와 바지. 내 모습과 비교되었다. 나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뿐 한 마디도 건네지 못했다. 아이는 내 시선을 받으며 피아노에만 집중했다. 레슨이 끝나고 학원을 나설 때였다. 강렬한 햇빛 때문인지 아이는 어지럽다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나는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어느덧 나는 초등학생이 되었고, 일 년 후 그 아이도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아이는 공부도 잘했다. 종종 전교 1등을 했고, 그림과 음악에도 재능이 있었다. 가장 부러웠던 것 중 하나는 옷이었다. 아이는 언제나 예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 시선의 끝 쪽에는 항상 그 아이에 대한 부러움과 동경이 있었다. 친해지고 싶었지만, 선뜻 말을 걸기가 쉽지 않았다. 서슴없이 말을 잘 건네는 나였지만, 그 아이에겐 다가가기 어려웠다. 학교가 아닌 곳에서도 우린 자주 만났지만, 모르 척 지나쳤다. 종종 엄마와 함께 있는 모습도 보았다. 그 아이 엄마 역시 젊고 아름다우셨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동네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밖이 소란스러워 창밖을 내다보았다. 동네 골목에서 장례식이 있었다. 내가 어렸던 시절에는 집에서 장례를 치르곤 했다. 한눈에 보아도 조촐한 장례식이 있었다. 홀린 듯, 친구 집 2층 베란다로 갔다. 상주로 보이는 한 여인이 보였다. 아는 얼굴이었다. 그 아이의 엄마. 멀리서도 얼마나 울다 지쳤는지를 알 수 있는 표정이었다. 엄마 옆에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아이는 우리 집 근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의아했다. 우리 뒷집의 셋방으로 이사를 온 것도, 등하굣길에 한 번을 만나지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난 이후였으니, 그때도 햇볕이 좋은 5월이었다. 길을 걷는데, 멀리서 그 아이가 보였다. 항상 예쁜 옷을 입고 있었었지만, 그날은 평범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했다. 길의 대각선에서 마주했던 것 같다. 아이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이는 팔과 다리가 심하게 불편해 보였다. 힘이 없는 다리는 흔들렸고, 몸을 가누기조차 힘겨워 보였다. 나를 향해 돌진하듯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걸어오면서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말이 심하게 어눌했다. 얼굴도 틀어져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반가운 듯 웃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 멍하니 아이를 바라기만 했다.
어디선가 키가 크고, 커트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튀어나오더니,
나에게
“괜찮으세요?”
“.....”
“죄송해요.” 하고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이를 부축하며 지나갔다. 끌려가듯 가면서, 아인 나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때 아이의 모습은 너무나 충격이었다. 우두커니 서서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장례식, 우리 동네로 이사 온 거, 그동안 마주치지 못한 거, 여러 생각들이 떠오르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가슴을 진정시킨 후에 집으로 왔다. 한동안 그 아이 생각이 가득했지만, 누구에게도 그 아이에 관해 묻지 않았다.
2012년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 로맨스가 필요해 2‘를 정주행 하고 있을 때였다.
남녀 주인공(이진욱, 정유미)은 오랫동안 친구와 연인의 관계를 반복하고 있었다. 남자주인공(이진욱)은 결혼과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 점을 궁금해하다가 이유를 알게 된다. 남자 집안에 유전병이 있었다. 유전병으로 어릴 때는 아버지를 잃었고, 최근에는 여동생을 하늘로 보낸 상황이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를 보며, 자신은 결혼도 아이도 욕심내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불쑥 그 아이가 생각났다. 완벽히 잊은 줄 알았는데...
그 아이도 유전병이었을까? ‘아 너무 잔인하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나를 향해 돌진해 오던 아이의 모습, 관람하듯 바라보았던 장례식에서 아이의 엄마가 떠올랐다. 또 종종 마주 췄던 아이와 엄마의 행복했던 모습들이 오버랩되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얼마나 울었는지 다음날 눈이 퉁퉁 부었다.
그 아이 생각이 가득했을 무렵, 유럽 여행 일정이 있었다. 독일에 사는 후배네 집에 놀러 갈 계획이었다. 후배는 그 아이와 같은 또래였다. 여행 중 숙소 발코니에서 일행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그 아이가 생각났다. 처음으로 그 아이에 대해 물었다.
“너 혹시 ‘이수연’이라고 알아”
“알지”
나는 후배에게 그동안 나와 그 아이 인연을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그 애 유전병이잖아”
“................” 한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아빠 쪽?”
장례식이 아버지 장례였구나. 그 무렵부터 이 아이는 아팠던 것 같다.
“응, 소아마비라고 하던데...”
그 아이 병명이 ‘소아마비’인지는 모른다. 후배도 어린 시절 또래의 소문을 기억해 낸 것이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때는 먹먹하기만 했지,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가슴이 답답해, 깊은 숨을 여러 번 내쉬었다.
아주 예뻤던 아이. 그 시절 내게 동화 속 공주님 같아 감히 말 한번 건네 보지 못했던 아이. 부러워는 했지만, 질투는 하지 않았던 아이. 차분하고 내향적이었던 아이. 그 아이를 나는 너무 좋아했었다. 단 한마디도 나눠보지 못했기에 난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몸이 불편해서 외출이 쉽지 않았겠지. 그리고 외로웠었겠지. 나를 보며 반가운 마음에 달려왔는데, 나는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어.... 웃어줄 걸, 손이라도 잡아줄걸....
그 시절 소녀들의 고민이나 걱정이 아닌, 마음대로 몸을 가눌 수 없는 병마와 싸우기엔 그 아이는 너무 어렸다. 제대로 피어나 보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린 아이. 발버둥 쳐볼 여력도 힘도 없었던 나이.....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눈물이 흐르지는 모르겠다. 이제는 그 아이가 편안하길 기도한다. 한편으로는 아이 엄마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건강하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