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이쾌대의 <카드놀이 하는 부부>
나에게는 열네 살짜리 친구가 있다. 귀엽고, 애교스럽고 간혹 엉뚱한 대답으로 나를 크게 웃게 해 준다. 열네 살이지만 공감능력과 배려심이 뛰어나, 이 친구와 나누는 대화는 항상 즐겁다. 스마트폰으로 그림을 보다가 아이에게 보여줬다.
“어때?”
“북한 같아요.”
“왜?”
이 친구는 어리다. 이유가 필요 없다. 척 보기에 그랬던 모양이다. ‘북한’이라는 단어가 왜 튀어나왔을까? 나는 작가가 월북을 한 사실만 알고 있었을 뿐, 작품과 작가의 다른 이력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림의 배경과 북한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시대 배경이 1930년대야.”
“….”
아이는 1930년대에 관한 지식이나 시대적 이미지가 없어서인지 말없이 그림만 바라보았다.
“그럼, 간첩이에요”
“뭐?”
웃음이 났다. 단순한 아이는 북한과 간첩을 이상하게 이어 붙였다. 나는 시대 배경을 설명해 주었다. 아이는 설명을 들은 후에도 그러거나 말거나 그림을 즐기는 듯 보였다. 생각을 거치치 않은 단어를 내뱉었고, 혼자 키득 거리며 웃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도 재미있었다. 아이는 자신의 방식으로 그림을 읽어 내려갔다.
초록색 저고리, 빨간 옷고름, 쪽진 머리를 한 여인과 카드놀이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표정마저 경직되어 있다. 초록과 빨강이라는 보색 대비, 쪽진 여인과 카드놀이가 빚는 묘한 이질감이 아이에게 북한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 것 같았다.
아이의 엉뚱한 이야기는 재미있게 흘러갔다. 웃다가 보니 ‘어, 눈썰미가 나보다 좋은데’ 하는 부분도 있었다. 천진한 아이의 눈에는 두 인물이 남매로 보인 듯했다. 다시 보니 정말 닮았다. 부부는 닮는다 하더니…. 예리한 눈매, 오뚝한 콧날, 도톰한 입술, 갸름한 얼굴형. 내 눈에도 남매같이 보였다. 작가는 귀하고 어여쁜 아내를 닮고 싶었나 보다.
내가 공감하자 더 신이 난 듯했다. 아이의 눈썰미는 예리했다.
“남자만 취했어요.”
“응?”
“남자만 볼과 코끝이 빨개요.”
엄지와 검지로 그림을 확대했다. 초록색 저고리의 여인보다 양복을 입은 남자의 볼과 코가 빨갰다. 그림 속의 위스키는 남자 혼자 마셨나? 작가는 가볍게 카드놀이를 하는 인물의 표정을 무겁게 표현했다. 둘만의 대화를 나누다가 엿듣는 누군가를 발견하기라도 했을까? 굳은 표정으로 한 방향을 바라본다.
“낙엽냄새가 뭔데요?”
하늘이 맑고 화창한 날, 우리는 한강에 갔었다. 강가의 풀밭을 걷다가 아이가 말했다. 아이는 간혹 내게 냄새를 단어로 말해 달라고 했다. 어휘력이 부족한 나에겐 너무 어려운 요구였다.
“이 냄새가 뭐예요?”
“무슨 냄새?”
형태를 알 수 없는 냄새를 공감할 수 있는 단어로 번역해 달라고 하니, 답답했다.
“낙엽냄새인가?”
“낙엽냄새가 뭔데요?”
“나뭇잎이 땅에서 축축해진 냄새, 아니면 물이 가까이 있으니 물비린내 같은 건가.”
“이 냄새는 제가 아주 어릴 때 살았던 동네 냄새 같아요.”
“내가 그 냄새를 어떻게 아니? 응?”
“하하하.”
나도 따라 웃었다.
이 친구는 길을 걸을 때, 날씨, 순간의 감정, 골목에서 나는 냄새를 단어나 문장으로 만든다고 했다. 그러면 걷기가 지루하지 않다며, 나 보고도 해 보라고 권했다.
한 뼘쯤 올라간 소매의 쓸쓸함
“이 그림에서는 어떤 향이 나니?”
내가 물었다.
“글쎄요.”
아이는 대답을 주저했다. 서로 말없이 그림을 보았다.
내 눈을 끈 것은 여인의 손목이었다. 한 뼘쯤 올라간 소매가 쓸쓸하고 추워 보였다. 손목뼈가 화려한 의상과 대비되어 초라했다. 탁자 위의 카드와 손에 쥔 카드를 살펴보았다. 카드게임의 규칙을 모르는 탓에, 그 상황을 알 수는 없었다. 시선은 바로 병으로 갔다. 병 모양으로 봐서는 고급술인 듯했다. 작가가 대지주의 아들인 만큼 그래 보였다. 배경도 부잣집 정원 같았다. 1930년대의 배경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현대적이다. 짙은 녹색과 핑크색 꽃이 있는 정원으로 눈이 갔다. 꽃향기가 진하게 풍길 것만 같다. 초록 잎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면, 박하향이 날 듯하다. 향기롭고 청량하면서도 쓸쓸한 향. 이 향기들을 글로 어떻게 만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