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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보연진아 Aug 12. 2024

오늘은 행복했었니?

ㅡ메리 카사트의 <목욕하는 아이>

어떻게 해야 학원에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일곱 살 때,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학원이었다. 특히 피아노 학원은 죽어도 가기 싫었다. 엄마에게 혼나는 일은 대부분 피아노 학원 가는 일 때문이었다. 

    

피아노 학원과 목욕

가지 않으려는 나와 어떻게 해서든 보내려는 엄마. 날 역시 피아노학원 때문에 혼났을 것이다. 나는 가기 싫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그 바람에 몸이 엉망이 되었다. 그런 나를 엄마는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목욕을 시켰다. 매번은 아니었지만, 혼나고 나면 목욕을 했던 것 같다. 눈물 콧물에, 긴장하며 흘린 땀까지 씻어내기엔 목욕이 좋으니까. 시간이 흘러 기억은 희미하지만, 혼났고, 울었고, 목욕을 했던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꺼이꺼이 울던 감정도 목욕 후에는 이상하게도 진정이 되었다. 그리고 피아노 학원에 갔다. 다른 날과 큰 차이는 없었다. 그때의 기억이 한 조각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 집은 크고 창이 많아 추웠다. 목욕이 지금처럼 욕조 가득 따뜻한 물을 받아 놓고, 거품을 만들 수도 없었고, 좋아하는 장난감을 물에 띄워 놓고 할 수 있는 놀이는 아니었다. 아주 더운 여름이 아니면 불편한 의식이었다.     



메리 커샛_아이의 목욕


목욕하는 아이와  엄마

그림 속 아이는 엄마의 무릎에 앉아 있다. 메리 카사트의 <목욕하는 아이>에 대한 첫인상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나의 목욕이 떠올라 그랬을까? 굵고, 투박하고, 신경질이 남아 있던 엄마의 거친 손길을 기억나게 해서일까?

엄마의 무릎에 앉아 있는 아이는 무표정이다. 한 손으로 엄마의 무릎을 잡고, 자세를 버티고 있다. 목욕을 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물, 비누나 타월 없이 손만 사용하고 있다. 아이를 감싸고 있는 손은 크다. 아이 엄마도 여리 여리하거나 야위지 않다. 엄마의 손길은 조심스레 작고 귀여운 발을 닦는다. 엄마의 눈길을 오직 아이의 발을 향하고 있다. 아이의 말랑거리는 발을 문지르며,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것 같다. 특별한 표정이 없지만, 우울해 보이지도 않는다. 아이 또한 말이 없다. 이 또래의 아이들은 엄마에게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나 하고 잠시 생각해 본다.

바닥의 타일과 뒤쪽 가구로 봐서는 꽤 부유한 집인 것 같다. 물은 담은 물병도 고급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엄마는 머리를 아주 단정히 빗어 올렸을 뿐, 자신을 꾸미는 장신구가 하나도 없다. 아이의 발을 닦는 모습은 세족식을 연상시킨다. 정성스레 아이의 발부터 닦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씻은 후의 장면도 궁금하다.     

화가 메리 카사트의 그림을 찾아보았다. 재미있는 그림을 한 점 발견했다. <목욕하는 아이>의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는 듯한 그림이었다. <여자 목욕(Womam Bathing)>(1891)에서는 엄마가 자신의 얼굴을 씻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같은 옷을 입고, 바닥에 물병도 그대로 있었다. 이어지는 '일일극' 같았다. 그녀는 흔히 모성애적 그림이라고 하는 아이와 여성의 모습들을 주로 그렸지만, 평생 그림을 그리며 미혼으로 살았다. 그림은 가정, 여인들, 아이, 여인과 아이 등이 주요 소재였다. 대부분 집 안이 배경이었다. 색채가 밝고, 붓 터치가 경쾌해 여성들이 화려해 보이지만, 얼굴에서 환하게 웃는 표정은 찾아볼 수 없다.     


모성애와 노동 사이

<목욕하는 아이>가 처음에 불편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이와 엄마 사이의 다정한 대화가 상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무감이 좀 더 강해 보였다. 현실적으로, 여성이 아이를 키우는 일을 ‘모성애’라는 사랑의 행위보다 ‘노동’에 무게를 둔 것 같았다.    


      

메리 카사트, <여자 목욕>, 1891, 트라이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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