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적 상호작용론
어떤 문제에 주목하게 만들고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사람들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문제제조자는 동정, 두려움, 도덕적 분노와 같은 우리의 감정에 호소한다. 우리는 대부분 병에 걸린 나무들, 유기된 애완동물, 길바닥에서 자고 있는 노숙자들을 보면 마음이 좋지 않다.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공감력은 귀 기울이고 돕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또한 우리는 두려운 마음에서 행동할 수도 있다. 만약 누군가 우리에게 우리가 (또는 우리가 아끼는 사람들이) 위험에 처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깊게 관여하고 행동할 동기를 충분히 얻는다. 우리의 도덕적 감각 또한 도움이 된다. 어떤 사람들이 괴롭히기, 모욕주기, 고문하기와 같은 개탄스러운 행동을 저지른다면, 우리의 분노는 그 불의에 조치를 취하도록 힘을 준다.
우리에게서 강한 반응을 뽑아내기 위해, 문제제조자들은 사회 문제를 증폭한다. 그들은 사회적 이슈를 실제보다 더 크고 더 중요한 것이라고 묘사한다. 정밀하면 지루하다. 정확성은 갸륵하지만 설득력이 부족하다. 다양한 수사학적 전략으로 사회 문제의 심각성을 부풀리고 이는 우리의 경각심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문제제조자는 상황의 특징을 가장 극단적인 용어로 기술하는데, 이는 이들이 쓰는 기본적인 과장 전략이다. 정치가, 전문가, 평범한 사람들 모두 공교육, 의료보험, 경제에 대해 "끔찍한", "X통에 빠진",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완전히 기능을 상실한" 등의 표현을 사용해 묘사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다음 두 문장을 비교해 보자. "우리의 의료보험 체계는 대참사입니다!", "우리 의료보험 체계는 상대적으로 견고하고, 더 합리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내년, 일부 주에서는 보험료를 20% 인상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보조금이 이런 비용을 일부 상쇄할 것입니다." 후자의 기술은 더 정확하고 이성적이지만, 훨씬 덜 주목받을 것이다. "대참사!"라고 과장하며 비난하는 정치인은 더 많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극적인 한 마디는 텔레비전과 온라인, 지면에서 재생되고 인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와는 거리가 먼 공무원이 제공하는 더 장황하고 미묘한 논의는 훨씬 덜 다루어질 것이다.
"지옥에서 살고 있다(living in hell)"라는 과장된 주장을 생각해 보자. 지옥은 무시무시한 곳이다. 이 단어는 구원의 희망이 없는 영원히 극심한 고통이라는 이미지를 일으킨다. "지옥에서 살고 있음"을 구글에서 검색한다면, 문제제조자들이 온갖 종류의 상태에 대한 묘사 구로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애디슨 병, 에이즈, 대기 오염, 알츠하이머, 거식증, 불안증, 관절염, 천식 등을 겪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알코올, 약물, 음식, 도박, 포르노그라피, 섹스 등의 중독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지옥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모든 주장들이 다 과장인 것은 아닐 것이다.
사회 문제를 증폭하는 다른 방식은 드문 일을 경향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어떤 현상이 두 번, 세 번 발생하는 것은 문제제조자에게 있어 위험한 패턴이 나타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마치 "산불처럼 번지고" 있다고 단언하기에 충분하다. 다른 주에서 발생한 두 건의 학교 총기 사고는 전국을 휩쓸 폭력의 "전염병"으로 묘사되고, 몇 건의 강도 사건은 "범죄의 파도"가 밀려 오는 것이 된다. 이런 사례에는 진짜 심각한 문제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제조자들은 그 이슈를 신중한 정확성이 아닌 멜로드라마 같은 방식의 언어로 기술한다. 보통 폭발적 증가라는 주장은 추세를 보여주는 엄격한 다년 데이터를 인용하지 않는다.
문제제조자가 사회 문제를 증폭하는 세 번째 방식은 문제를 일반화하는 것이다. 일반화하는 주장은 위험한 상황이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고 기술한다. 예를 들어, 비만과 살인은 어떤 경계를 갖지 않는 것이 사실이고, 사회 어느 영역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비만과 살인 발생률은 계층, 인종, 성별, 나이, 지역 등의 변수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들마다 고통받을 확률이 같지 않다. 시카고에 사는 젊은 흑인 남성은 교외에 사는 백인 여성 노인보다 총기 폭력으로 사망할 위험이 더 높다. 문제가 "무작위적으로" "어디서나" 일어난다고 보는 것은 보통 그것의 영향을 과장하는 것으로, 주의를 끌어 모으고, 경각심을 일으키며,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드는 이점이 있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 말을 보자. "우리가 범죄를 없애겠습니다. 여러분은 총에 맞지 않고 거리를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밖에 나가면 총에 맞습니다."
We’ll get rid of the crime. You’ll be able to walk down the street without getting shot. Rightnow, you walk down the street, you get shot.
사회 문제 증폭의 네 번째 방식은 전쟁 메타포 사용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나 사람들을 국가의 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정치인이나 전문가와 함께, 대통령들도 빈번하게 사회 문제와의 전쟁을 선언한다. 1930년대, 루스벨트 대통령은 공황, 농장의 공급 초과, 농촌 빈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1950년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빈곤과 결핍의 잔인함에 대한 … 새로운 종류의 전쟁"을 촉구했다. 1960년대 존슨도 가난과 범죄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고, 닉슨은 범죄에 대한 전쟁을 갱신하면서 목록에 암도 추가하였다. 그 후 제럴드 포드는 “인플레이션과의 전면전”을 개시했고, 이어서 지미 카터는 에너지 위기를 "전쟁의 도덕적 등가물"이라고 했다. 로널드 레이건은 약물과의 전쟁을 반복적으로 선포했고, 조지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문제제조자는 전쟁이라는 개념을 호출함으로써 공격, 방어, 전투, 싸움, 적과 같은 관련 단어 또한 불러내면서 그 문제의 시급성을 강조한다. 전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중단시켜야 하는 악으로부터의 존재적 위협을 의미한다. 전쟁의 명분에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은 배신자가 될 위험이 있다. 모든 사람은 나쁜 편이 아닌 착한 편에 있어야 한다. "여러분은 테러와의 싸움에서 우리와 함께가 아니라면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조지 부시가 한 말로 유명하다. 전쟁 시 문제제조자들은 비용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을 갈등이 끝날 때까지 미루어 둔다. 전쟁 메타포라는 멜로드라마와 지루하고 소심한 과학의 언어를 비교해 보라: "연구에 따르면, 경제가 매년 최소 1.5%씩 성장한다고 가정할 때, 정책 X, Y, Z를 시행함으로써 5년 내에 빈곤율을 2.9% 줄일 수 있습니다."
사회 문제에 전쟁을 선언할 수도 있고, 문제 자체가 전쟁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보수적인 전문가들은 세간의 크리스마스 전쟁에 대해 경각심을 촉구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Happy holidays!"라고 인사하는 것과 회사나 정부 기관에서 예수 탄생 장면을 비종교적인 장식으로 대체하는 것들은 "공격"의 사례이다. 이 사람들은 세속화와 종교적 포용성을 향한 이 움직임을 전쟁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 좌파 비평가들은 공화당 의원들이 낙태 권리를 제한하고 가족계획 클리닉의 정부 지원을 철회한다는 얘기를 꺼낼 때마다 "여성에 대한 전쟁"이라며 맹비난한다. 두 경우 모두 전쟁 메타포는 문제제조자가 자신의 관점과 의제에 따라 문제를 해석하는 것에 큰 힘을 실어준다.
다소 미묘하게 증폭하는 방법도 있다. 사회 문제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이슈에 관심을 갖기 바라는 문제제조자는 종종 그 이슈를 이미 정당화된 사회 문제의 영역 안에 넣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또한 우리 모두가 나쁘다고 한 것의 사례입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기 아이들을 간접흡연에 노출시키는 것은 건강에 나쁘고 분별없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슈를 아동 학대라는, 누구나 비난하는 행동의 한 형태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더 화가 나고 더 참을 수 없는 행위가 된다. 성희롱 문제를 보자. 초기 사례들은 부하 직원과 성관계를 하기 위해 위협하거나 금품을 제공하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수 십 년 동안 문제제기자들은 음란한 농담을 하고 수영복 달력을 거는 것과 같은 다른 종류의 행위도 포함하면서 그 영역을 확장했다.
영역 확장은 문제가 포괄하는 범위를 넓히면서 그 문제를 더 크게 만든다. 이와 동시에 새 이슈는 이미 확립되어 있는 정당하고 중대한 사회 문제에 딸려 들어가 이득을 취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증폭에는 단점이 있다. 확고했던 기존 문제가 희석될 수 있다. 문제제조자들이 영역을 새로운 방향으로 확장하면, 논란이 커지면서 새로운 주장은 더 회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예컨대, 아동 학대는 아주 어린아이에게 심각한 신체적 위해를 가하는 문제에서 시작했다. 이후 문제제기자들은 성적 학대, 정서적 학대, 방임은 물론, 체벌, 할례 의식, 종교적 주입, 전통적 성역할 사회화에 이르는 이 모든 것을 아동 학대라는 우산 밑으로 넣었다.
사회 문제를 증폭하는 여섯 번째 전략은 문제의 실제 크기나 효과를 과장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숫자를 이용하는 것이다. 기자, 활동가, 정치가, 블로거, 심지어 과학적 전문가들을 포함해 모든 종류의 문제제조자들은 통계를 (잘못) 이용한다. 어떤 현상이 너무 새롭거나 측정하기 매우 어려운 경우, 문제제조자는 그 문제의 잠재적인 크기를 과장해서 추정한 통계치를 제공한다. 이러한 과대 추정은 한 건축학 교수가 미국에서 창문에 부딪혀 죽는 새의 숫자가 매년 10억 마리라고 주장한 것에서처럼 "크게 어림한 수"의 형태를 띤다. 이렇게 죽는 새들이 350만이라고 훨씬 낮게 보는 문제제조자도 있지만, 이 수치들은 모두 추정일 뿐이다. 가장 큰 추정치를 선택함으로써 문제제조자는 자신의 명분에 대한 더 많은 동정심 또는 더 큰 분노를 끌어내려고 한다. 이 경우는 새를 보호하기 위한 건축 관행 도입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다.
이슈를 증폭하려는 사람들은 절대적 수치보다 의도적으로 비율을 사용하기도 한다. 만약 어느 해에 비행기 사고가 2건이 일고, 다음 해에 3건의 사고가 발생했다고 하자. "2건에서 3건으로 증가"는 "비행기 사고 50% 증가!"보다 훨씬 덜 놀랍다. 반대로, 낮아 보이는 비율은 사용하지 않는다. "백만 명의 미국인이 X로 고생한다"는 "인구의 0.3%가 X로 고생한다"보다 더 강렬하다. 문제제조자는 문제를 더 커 보이게 하는 수치를 선택한다.
통계치를 인용하는 것은 권위를 세워 주지만 재미가 없다. 다채로운 일화는 양적인 증거를 확대하거나 대체한다. 문제제조자는 관심을 최대한으로 일으키기 위해 어떤 사건을 전형화하는 사례를 신중하게 선택한다. 이러한 사건들은 평균적이거나 가장 흔한 경우를 거의 대표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제조자는 그 일화가 전형적이라고 암시한다 (또는 대중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내버려 둔다). 예를 들어,
얼핏 보면, 말도 안 되게 많은 아침 새 구경 같다: 멧종다리 4,136마리, 검은눈방울새 3,632마리, 늪참새 3,362마리, 흰목참새 2,532마리, 갈색지빠귀 1,417마리. 그러나 이 숫자는 살아있는 새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1978년 가을부터 2004년까지 시카고의 한 빌딩에 부딪혀 죽은 새들을 수를 기록했다. 물론 다른 종류의 새들도 무수히 많이 죽었다. 모두 141종에 달하는 31,705마리의 새들이 건물 앞에서 죽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비슷하다. 인공 구조물과의 충돌은 북아메리카 철새 사망 원인의 2위를 차지한다.
이 글의 저자는 한 끔찍한 건물에서 벌어진 이야기가 전국에 걸쳐 유사하게 펼쳐진다고 말한다. 저자의 전략적인 통계치 사용도 주목하라. 일 년 평균치가 아닌 26년간의 합계를 제시했다. 전형화하는 예시와 무시무시한 숫자를 사용하는 것은 문제를 증폭하고 우리의 동정심을 자극하는데 기여한다.
문제제조자는 사회 문제를 증폭하거나 그것을 더 크고 중대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수사학적 전략을 사용한다: 과장하기, 사건을 경향으로 취급하기, 일반화하기, 전쟁 메타포 사용하기, 영역 확장하기, 무시무시한 수치 사용하기, 그리고 전형화하는 사례 들기.
위 글은 Kathy Charmaz, Scott R. Harris, Leslie Irvine이 저술한 "The Social Self and Everyday Life: Understanding the World Through Symbolic Interactionism"이라는 책의 9장 Amplifying Social Problems 중 일부를 해석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