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부의 기본 업무 Ⅱ, "정산"
드라마 제작부로 일하다 보면 가장 정신없고 바쁜 시기가 있다.
바로 '월 초'다.
월초가 왜 가장 정신이 없고 바쁘냐 하면, 바로 그 전달에 썼던 모든 금액을 정산하는 시기가 바로 그때이기 때문이다. 문과 출신이라 할 지라도, 이과 출신이라 할 지라도 제작부를 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게 있는데, 그건 바로 '숫자'다. 숫자들에 둘러 싸여 숫자와의 싸움에서 항상 긴장을 하며 지내야 하는 때가, 월초의 '정산'의 시기다.
드라마 정산은 크게 두 가지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영수증 정리', 하나는 '업체 검수'다.
(물론 좀 더 세세하게 나누면 더 많은 일이 있지만, 우선 여기선 두 가지만 얘기해보기로 한다.)
현장 라인 PD로 일을 하게 되면 무조건 거치는 코스는 바로 '영수증 정리'다.
영수증 정리라 하면 막연할 수 있지만, 어쨌든 전 달에 썼던 영수증들을 모아서 지난달에 얼마나 썼는지 확인하고 체크하는 작업이다.
영수증은 이미 썼던 '법인카드' 영수증들을 확인하는 작업도 있고,
스태프들이 썼던 영수증들을 일일이 하나하나 확인해서 입력하고 전달하는 작업도 있다.
회사마다 케바케지만, 법인카드 영수증을 정리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보통은 법인카드 내역이 한눈에 확인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 내역을 받아서 대조하여 입력하면 끝이다.
그래서 법인카드 정리는 시간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고, 난이도도 별 한 개짜리 정도다.
하지만 스태프들이 썼던 영수증 정리는 이야기가 다르다.
월초만 되면 제작부들은 더욱 현장 여기저기를 누비며 스태프들의 영수증을 걷는다.
물론 제때 잘 주는 스탭도 많지만, 뭐 하다 잊어버리고 영수증을 늦게 주는 스태프들도 부지기수다.
마감 날짜는 정해져 있는데, 늦게 주는 스태프들 때문에 속 타는 건 우리뿐이다.
어쨌든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나는 월말이 가까워오면 미리미리 스태프들에게 인지를 시켜주는 편이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내 월급날은 그렇게 천천히 돌아오는 것 같은데, 정산만큼은 어째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 건지, 시간의 흐름은 참 신기할 뿐이다.
영수증을 걷어오면 그때부터는 이제 자신과의 싸움이다.
회사마다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입력하는 영수증의 정보들은 거의 비슷하다.
날짜, 영수증 사용처 (사용 매장), 사용 금액, 사용 목적 이 바로 그것이다.
즉, 몇 년도 몇 월 며칠에, 어디에서, 얼마를, 무슨 목적으로 썼는지를 입력한다.
영수증이란 것이 모두 규격화되어 위의 내용들이 한눈에 바로 들어오면 좋으련만,
전국에 있는 수천만 개의 매장만큼 영수증의 모양도 제각각이라 위의 것들을 파악하는 데에도 처음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보통 영수증이 가장 많은 팀은, 로케이션 (섭외) 팀인데, 한 달 내내 장소 섭외를 위해 돌아다녀야 하다 보니 영수증 양도 어마어마하다. 그런 팀의 영수증을 정리하면서 입력하고 날 때면, 나중엔 뒷목과 어깨가 뻐근할 정도다.
(그래서 월초에 섭외팀 영수증을 받아올 때면 나도 모르게 각오(!)가 절로 지어지기도 한다. 아마도 이전 경험에서 온 고통? 을 알기 때문에 그럴 지도.)
그렇게 정보를 입력한 영수증 파일들은 모두 회계팀으로 전달한다.
물론, 그 사이에 입력한 정보가 틀린 것은 없는지, 혹은 드라마 업무 목적이 아닌 사적으로 사용한 것은 없는지 중간에서 검토한 이후에 전달한다.
그리고 영수증 파일을 바탕으로, 이제 본격적으로 영수증을 하나하나 종이에 붙인다!
회사마다, 총괄마다, 모두 방법이 다르니 이건 프로젝트 별로 확인해서 붙이도록 하자.
영수증을 잘 붙이면 회사에서도 좋아하고, 회계팀에서도 좋아한다. (진짜다!)
참고로 나는 전국에 있는 제작 PD들 중에 영수증을 잘 못 붙이는 하위권에 속하는 사람이다.
(꼼꼼하지 못해서?)
드라마 별로 다르겠지만, 아마 적게는 15명에서 많게는 5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의 영수증을 정리하는 일은 그야말로 '영수증 개미지옥'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어쩌랴. 돈의 흐름을 파악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 바로 이 '영수증 정리'임을.
영수증 처리가 끝났다면, 이제는 업체 검수도 해야 한다.
업체 검수는, 전달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 도움을 받았던 다양한 업체들의 사용 내역을 검수하고 그게 맞게 대금을 지급하는 일이다.
드라마 자체가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지는 '대형 프로젝트' 다.
사람 혼자서 만들다기보다는, 드라마를 구성하는 많은 스태프들의 지원으로 만들어진다.
현장을 오가는 이동수단 (버스, 승합차량)으로 도움 주시는 분들도 있고,
드라마 소품 차량이나, 차량 씬을 촬영하기 위한 렉카 업체도 있고,
드라마 주연 배우 외에 깔리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보조출연 업체도 있고,
폭발이나 총격 씬을 위한 특수 효과, 더미를 만들고 상처를 만드는 특수 분장 등등
다양한 업체들과 사람들의 노력과 헌신으로 만들어진다.
업체들의 도움을 받고 사용한 내역은 보통 월 단위로 정산해서 금액이 나가곤 하기 때문에, 매달 다음 달초에는 업체들에게 일일이 연락해서 전 달에 사용한 내역 검수서를 달라고 한다.
드라마 제작 초창기에는 업체들이 돈을 더 받기 위해 사용 내역을 부풀리거나 조작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고는 하지만, 요새는 그런 일은 없다시피 한다. 그리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증거서류가 있다.
바로 매일매일 정리하는 '제작일지'가 그것이다. (드라마 제작일지를 써 보자)
업체에서 검수서가 오면, 사용내역이 맞는지 제작일지와 함께 비교하여 검수한다.
(그렇기에 드라마 제작일지가 아주아주 중요한 것이다!)
업체 사용 금액은 많게는 몇백만 원에서 몇천, 몇억까지도 가는 게 사실이라, 사실 드라마 전체 촬영 금액의 대부분이 이리로 나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이 누구 하나의 독단적인 능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닫기도 한다.
드라마 엔딩 크레딧에 뭔 그리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가나 싶었는데,
드라마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또 정산을 하다 보니 그 크레딧에 올라가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다 하나하나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니, 새삼 기분이 묘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제작부로서 효율적인 돈 관리를 위해 업체와의 미묘한 신경전도 매월 초마다 벌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럴 때는 스트레스 아닌 스트레스도 받기도 한다.
그렇게 서로 업체와의 금액을 확정하고 나면, 업체 쪽에 영수증을 발급해달라고 요청한다.
업체의 영수증은 '세금계산서'인데, 세금계산서의 날짜나 공급가액 역시 최종적으로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회사 내에서 회계 결산 처리할 때 복잡한 일이 발생한다.
세금계산서까지 발급이 완료된 것을 확인하면 업체 검수의 일은 끝이 난다.
이번 달은 끝이다.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 매달 반복해야 한다.
특히 요즘 같은 사전 제작이 자리 잡은 때는, 촬영 기간이 적으면 6개월 많으면 그 이상도 가기 때문에, 최소 5~6번 이상의 정산을 진행해야 한다.
말이 5~6번이지, 사실상 가장 강도 높은 스트레스 업무가 5~6번 이상 반복된다는 말과도 같다.
하지만 어떡하랴.
정산이야말로 제작부의 기본 업무이자 가장 중요한 업무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