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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뭔들 Apr 02. 2022

차도에 나 홀로 서 있는 기분이란

제작PD로 살아남기 ② : 차량 씬을 촬영하는 방법

드라마를 보다 보면 심심찮게 꼭 나오는 장면이 있다.

바로 주인공(혹은 등장인물)이 차를 타고 이동하거나, 

차 안에서 이동하면서 대화하거나, (통화를 하거나) 하는 장면이다.


사극이나 시대극이 아니고서야 현대극에서는 언제부턴가 꼭 나오는 필수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차'라는 공간은 일반적인 건물 내부에서 촬영하는 공간 자체가 주는 느낌과는 조금 다르다.

아무래도 밀폐되어 있고, 은밀하며, 프라이빗 (Private) 한 느낌을 많이 주다 보니,

정적이면서도 동시에 동적이고,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오픈된 공간이라서,

신비롭고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서 많은 드라마에서 차량 씬이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MBC <그 남자의 기억법> 중에서




차량 씬을 찍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달리거나, 멈춰있거나. (혹은 달려와서 멈추거나.)


아무래도 차량 씬을 촬영하려면 일반 도로에서 찍는 경우가 90% 이상이다 보니,

특히 안전 도로 통제에 큰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촬영팀 스탭이나 배우가 다칠 수가 있고

또는 주변 교통 통제 흐름에 방해가 되어 민폐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도로 통제는 연출부에서 담당하나, 간혹 대로가 큰 경우에는 제작부, 섭외팀 등 같이 나서서 차량 흐름을 원활하게 통제하는 한편, 스탭들이나 배우들 촬영 시 다른 차들이 마구잡이로 뛰어들지 못하게 막기도 한다.



그날은 일산 코엑스 주변 8차선에서 찍자고 한 날이었다.

한 차선 자체가 사람 몸보다 큰 데다가, 차량이 많지 않은 곳이다 보니 오히려 차들이 씽씽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어서 차량씬을 찍는데 주의가 필요했다.

한 여름의 이글거리는 햇볕에 타지 않게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팔에는 팔토시, 

손에는 경광봉을 들고, 도로 먼지를 먹지 않게 마스크도 야무지게 챙겨 쓴 채 도로 한가운데로 나섰다. 


매캐한 도로의 연기와 아스팔트의 분진이 코끝을 찔렀다.

라바콘에 경광봉을 꽂아서는,  차량 흐름에 방해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촬영팀의 안전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지점에다가 내려놓았다.

신호대기에 서 있는 차들을 보니 절로 경광봉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마치 침략에 대비하는 잔다르크의 심정이 된 것만 같았다.

스탭들의 안전도 안전이지만, 자칫하면 나 자신의 안전도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뭇 긴장이 됐다.

신호대기 선에 나란히 선 차들과 나의 대치상황에 자못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잠시 후 저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면 적들(?)이 일렬로 몰려오리라.

나는 다시 한번 전의를 불태우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신호대기에 목이 말랐던 차들은 일제히 액셀 소리를 높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차도에서 차들의 운행 흐름을 한쪽으로 유도하기 위해 힘차게 경광봉을 흔들어댔다.

도로에 큰 장정의 남자가 서서 흐름을 방해했다면,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해주려고 벼르고 있던 운전자들은,

키도 작고 체구도 작은 여자가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도로 통제하는 모습에 어쩐지 애잔함을 느꼈는지,

안전하게 속도를 줄이며 통제에 협조해주기 시작했다. 


평소 차를 타고 다니면 그렇게 짧게만 느껴졌던 파란 신호 이건만,

어쩐지 이번만큼은 파란 신호가 끊길 기세가 좀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 파란 신호를 일부러 연장시켜 놓은 것일까, 생각이 들 정도로 이번 따라 길게만 느껴졌다.

아니면 촬영팀이라도 촬영을 빨리 끝내서 이 뜨거운 아스팔트 지옥에서 나를 좀 내보내 줬으면 하는 마음도 컸다.

뜨거운 아스팔트 지옥의 열기 위에 차들의 매연이 섞이면서 만들어내는 환장의 콜라보 속에서,

나는 그렇게 한 명의 '캡틴 드라마팀'이 되어 촬영팀을 지키고 있던 것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막으면서 서 있었을까.

차량이 없어지자 나는 촬영 현장 쪽을 한번 뒤돌아봤다.

이렇게 도로를 오랫동안 막고 있었으니 촬영은 많이 진척되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도 컸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아직 차량 쪽에 카메라를 세팅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

나는 다시 한번 전사가 되어야만 했다.


차도에 나 홀로 서 있는 기분이란.



(※ 실제로는 도로 촬영 협조를 받은 상태에서 안전에 유의하며 촬영에 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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