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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뭔들 May 29. 2022

세상은 넓고, 주인공은 많다

제작 PD로 살아남기 ④ : 주인공 대역의 세계

드라마를 보다 보면 참 많은 직업들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방송되는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알고 있던 직업도 있지만,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직업의 세계도 다루는 드라마도 참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동시에 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데에는 참 많은 사람들과 많은 직업군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의사, 변호사, 검사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드라마에선 흔하디 흔한(?) 직업이 되어 버렸고,

파티시에, 호텔리어, 기자 등은 드라마를 통해 더욱 유명해진 직업이 되어 버렸다.

드라마가 세상을 다루는 이야기인 만큼, 드라마에는 참 많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뤄지고 있다.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의 제1 걱정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다양한 직업이 나오는 드라마이니 만큼, 그 직업을 배우가 소화하거나 아니면 소화시켜주어야만 한다.

특히 전문직 중에서도 전문 기술이 등장하는 장면이라면 그 고민은 깊어진다.

배우가 그 기술을 다룰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보통의 경우는 그 기술을 갖고 있지 않은 게 일반적이다.


그런 기술을 대표하는 게 바로 의학 드라마의 수술 장면이다.

전문 의사가 아니고서야 어찌 일반 사람이 수술의 'ㅅ'도 접해볼 수 있었으랴.

그럴 때는 실제로 수술을 집도해 본 의사를 섭외해 해당 장면을 대신 촬영하게 한다.

가끔, 만에 하나의 경우로 배우가 눈썰미와 손재주가 좋아서 현장에서 의사의 손놀림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해서 능숙하게 구현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런 경우는 로또 맞을 확률에 가깝다.

대부분은 대역이라는 분이 오셔서 그런 장면을 배우의 손 대신 촬영해주곤 한다.


대역을 구할 때 딱 하나 변하지 않는 불문율은 있다.

바로 배우와 최대한 '똑같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대역인 것이 티가 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배우의 신체사이즈, 피부톤 등과 똑같은 사람이어야 한다.


<뷰티풀 마인드> 수술 장면을 촬영하는 모습. ⓒ 래몽래인


직업뿐만이 아니다. 

주인공의 설정에 따라서도 대역을 구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 드라마를 할 때였다.

여주가 수영을 즐겨하고 좋아하는 설정으로, 남주와 수영 대결을 펼쳐서 이겨야 하는 내용이 대본의 한 장면에 표현되어 있었다.

문제는, 여주를 맡은 배우가 수영은 할 줄 알지만 남주를 이길 만큼 빠르게 수영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물론 실제로 두 배우가 수영을 하고, 남주가 조금 천천히 수영을 하면 표현될 수도 있겠으나,

드라마 상에서 보일 때 꽤 거짓말이라는 티가 뻔하게 날 법한 상황이었다.

결국 감독님은 여주의 수영 대역을 구해야 한다는 요청을 했고, 우리는 급하게 여주의 수영 대역을 구해야만 했다. 

(어쩐지 이런 대역을 구하는 것도 제작 PD의 몫인데, 구분이 뚜렷하게 지어지지 않은 영역의 일이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섭외하는 과정에서 돈도 들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수영을 '정말 잘' 하려면 선수급의 수영실력이 필요했으나,

우리 팀의 어느 누구도 '수영선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보통의 사람이었으면 지인의 지인의 지인을 통해서 알아보는 방법을 찾아봤겠지만, 나에겐 그럴 시간이 많지 않았을뿐더러, 그런 인맥적 능력을 활용하는 데도 한참이 모자랐다.


나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인맥이 없으면 새로운 창구를 뚫어야만 했다.  

그건 바로 프리랜서 재능 마켓 어플이었다.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클래스가 있어 깔았던 어플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나는 어플 상단에 '수영'을 검색했다.

다양한 수영 강사들의 프로필과 클래스들이 줄줄이 나왔다. 

거기서 주인공의 체형과 이미지가 비슷한 여성 수영 강사들에게 메시지를 여러 명에게 보냈고,

그중 한 명에게서 촬영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야호! 

촬영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고 대역분의 신체 프로필과 사진을 요청했다.

의상팀에 공유하니 맞춰서 의상을 함께 준비해준다고 했다.

나는 대역분에게 촬영 날짜와 시간, 장소를 함께 전달드렸다.

 

촬영 당일.

대역 분의 콜타임에 맞춰서 촬영 장소인 호텔에 도착했다.

대역 분은 밤 촬영이다 보니 꽤 피곤한 상태였다.

그런 데다가 예상보다 딜레이 된 앞 촬영 스케줄에,

대기 시간도 많이 길어지기도 해서 대역 분에게 죄송한 마음인 그때,

본 팀 촬영팀이 촬영 장소인 호텔에 도착했다.

의상팀에서 준비한 여주와 똑같은 수영복을 환복 한 대역분은, 피곤한 내색도 없이 곧바로 감독님과의 이야기를 통해 해야 할 촬영 장면의 디렉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주인공과 똑같은 수영복을 착용한 대역이 먼저 호텔 수영장의 물살을 시원하게 가르기 시작했다.

그 옆 레인에서는 남주가 같이 열심히 호흡을 맞추며 수영 장면의 큰 그림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멋진 그림을 만들기 위해, 호텔 수영장 위에 드론 카메라가 날아다니며 속도감 있는 장면을 촬영했다.

대역의 촬영이 끝나자 이제 실제로 배우가 투입됐다.

배우의 얼굴이 걸리는 부분은 배우가 실제로 연기를 해야 했고, 큰 그림은 다 촬영을 했기에 대역 분은 거기서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퇴근하는 대역분에게 다시 한 번 고개숙여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방송 당일.

나는 대역분에게 촬영분이 담긴 회차의 방송이 될 거라고 진심으로 감사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시청자에게는 잠깐 나가는 1~2초의 분량이었지만,

그 분량을 만들기 위해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많은 사람이 도와주며 함께 만들어 가고 있었다.


대역 분도 우리 드라마에서는 여주의 대역이었지만,

그분의 세상에서는 주인공이었을 것이다.


세상은 넓고, 주인공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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