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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Apr 24. 2022

디스크 환자의 작은 서재

아파도 글은 쓰고 일은 합니다.



허리가 아파서 1년 넘게 나의 서재가 되어 주고 있는 공간을 소개합니다.



소파에 누워 있다 일어나다 곧장 뻐근한 허리를 부여잡고 산지 어언 1년. 개월 수로는 15개월 정도가 된 지금, 조금씩 조금씩 허리에 무리 두지 않는 선에서 마련한 나의 작은 서재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오래 앉아 있으면 고관절에서부터 엉치와 허리까지 뻐근하고 묵직하게 올라오는 신경통 때문에 하루 10분도 연달아 앉지 못해 설 수밖에 없었다. 책은 읽고 싶고, 글도 써야 하고. 그러나 절대적으로 척추와 경추도 지켜야 하니 집안 곳곳을 살피며 나의 작은 서재를 찾아다녔다.


요즘은 높이 조절이 가능한 책상도 많다지만 이미 작은 방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남편이 총각시절부터 쓴 책상이 곁을 내어주지 않아 임시방편으로 부엌과 거실이 연결되어 있는, 그러나 엄연히 선을 그으면 부엌 공간에 배속된 기다란 서랍장이 나의 디스크용 책상으로 선택되었다.



높이가 배꼽에 올 정도로 높아 무선 키보드를 연결해 서 있는 채로 타이핑을 해도 적절했고 우드 무늬라서 살짝만 꾸며도 빈티지한 분위기를 풍기는 덕분에 이곳으로 발을 들이는데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 아무리 잠깐만 쓰는 나의 서재이자 책장이어도 분위기는 못 잃는 나는야 갬성주의자.


처음에는 액자 하나 툭 놓았던 작은 공간에 여기저기서 받은 예쁜 엽서를 붙여 놓고, 촛대도 하나 꽂아 놓고, 좋아하는 십자가상도 모셔 놓고, 만료된 여권도 야무지게 챙겨 놓고, 읽는 책에 붙일 인덱스와 형광펜도 모아 놓는 시간이 차곡차곡 더해졌다. 틈틈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서랍장 위에 알뜰살뜰 배치해 놓고 보니 1년이란 시간이 무럭무럭 지나면서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1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이 되었다.


책을 올려 쌓아 그 위에 독서 받침대를 눈높이에 맞추고 서서 책을 읽는 퇴근 후의 시간. 십 년 치 다이어리의 하루를 채우고 일주일의 운동 스케줄도 적고 필요에 의해 휴대폰 거치대 하나 사서 어플로 이렇게 글도 쓰고 있으니 이곳은 나의 창작소이자 놀이터이며, 외로울 때 글 뒤로 숨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주로 읽는 글에 의지하지만 오늘처럼 쓰는 글을 마주할 때도 여기에서 머문다.


계절이 변하면 꽃이나 엽서로 분위기도 바꿀 수 있고 자리가 협소한 탓에 손에 잡히는 것들도 가까워 뭘 하든 간에 금세 일로 집중하기도 좋다. 여기에 노동력을 끌어올리는 음악 한 볼륨이면 카페 부럽지 않은 홈오피스로 변신하니 꼿꼿이 허리 세우고 할 수 있을 때 부지런히 check list를 지운다.


책으로 쌓은 높이의 무게가 꽤 무거운 것 같아 좀 더 높게 목 높이 조절이 되는 독서 받침대를 하나 샀다.  앙상한 네 개의 다리로 이 무거운 것들을 버티고 있는 서랍장에게 미안해서라도 책탑은 빼야겠단 마음이 이제야 들다니. 그동안 내 허리만 부여잡느라 서랍장의 앙상한 네다리는 생각해주지 못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곳에 신세를 지려면 가능한 가볍게 유지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책무게를 덜어주리라.




디스크 환자에게 책상은 실용이 일 순위다. 감성이고 뭐고 일단 편해야 뼈와 관절에 무리가 덜 간다. 오랫동안 글을 써온 작가와 프리랜서라면 목, 어깨, 팔꿈치, 손가락, 허리 등 어디 아프지 않은 곳 없고 꼭 탈이 나봐야 부랴부랴 뭔가를 바꾸는데 내가 아는 분은 목디스크 때문에 늘 팔이 저리고 눈도 침침한 지경에 이르러 손목아대는 필수요 안경까지 새로 맞추셨다. 병이란 놈들은 하나가 오면 꼭 다른 애들까지 손잡고 데려오니 되도록 틈을 안 보이는 게 좋고 이미 왔다면 얼르고 잘 달래서 보내든지 아니면 함께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니 가능한 척추가 덜 구부정하도록 허리에 좋은 쿠션을 쓰고 거북목이 되지 않게 받침대를 사서 모니터를 눈높이에 맞추시라. 그러면 그나마 목과 어깨, 허리에 가중되는 힘을 아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잡지나 인스타그램에서 보는 미니멀하고 깔끔한 책상 인테리어는 정말 나와 먼 사이처럼 느껴진다. 이쁜 데다 기능까지 완벽하면 금상첨화지만 원래 이쁜 것들은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으니 디스크 환자에게 책상은 트랜스포머처럼 필요에 따라 변신이 가능한 것이 최고다.


돈 때문에 필요한 것들 아끼지 말고(허리 수술은 천만 원 넘어요), 돈 벌려고 무리하게 일하지 말고(인공관절 수술은 오백만 원 넘어요), 해내고 싶은 마음과 그것에 대한 의욕도 굉장히 좋지만 쉬어야 할 때는 과감하게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것도 용기고 능력인 것 같다. 이번에 아프면서 배운 건 통증 이겨내는 장사 없고 내 몸인데 내가 너무 모르는 무식을 저지른 거였다. 분명히 신호를 몇 차례 보냈을 텐데 괜찮다는 핑계로 수신을 거부했던 나. 이젠 제법 사람다워져 허리와 책상이 공존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으니 제발 또 수신 거부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건강이 조금씩 회복되고 보니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고 필요한 것들도 생겨 나름의 방도를 찾아 나선다. 자그마한 통증에 예민하게 굴면서 축 처진 몸으로 하루를 버티던 끝에 또 다른 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인간이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책상이 있어야 한다."의 문장을 곱씹어 본다.


아프다고 해서 완전히 나를 잃을  없다. 오히려 삶의 의지를 붙잡아야 하고 아프지만 통증과 함께 살아가도록 마음을 바꿔야 한다. 그러려면 자기만의 책상 그리고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외치는 바입니다!  아니고 어디까지나 나의 경우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심정으로  공간을 마련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몸을 살살 달래 가며 정신서서히 회복시키는 과정은 환자들에게 아주 중요하다. 된통 아프고 나서야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단 말보단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단 말에 공감이 됐다.

아프면… 통증 있는 삶에서 온전한 정신세계를 구축하기란 결코 쉽지 않아 아픈 몸을 살아내야 마음도 살찌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밖에서 정신과 영혼이 휘둘려 돌아와도 이곳에 서서 뭔가를 끄적이고 읽으면 금방 나의 세계로 접속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걸 구원이라 부르고 다른 누군가는 생의 의지라고도 표현했다. 나는.. 그저 나에겐 편안하고 안전한 곳이 되었다. 비록 오래  있는 것도 무릎 관절에 치명타여서 머무는 시간이 짧은  단점이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작은 나의 행성을 가꾸고 지키는 어린 왕자의 심정으로 소중하게 이곳을 지키고 있다.


그러니 전국의 (목/허리) 디스크 환자들이여.

그리고 예비 환자들이여.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킵시다.

그리고 건강해졌다면 무리하지 말고 자신의 행성을 찾아 나섭시다.



ps. 제 행성에 모션 데스크는 꼭 두고 싶습니다만...





정신없어 보이지만 다 나름의 규칙과 자리가 있는 곳.


혼돈의 우주 속에서도 각자의 행성은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돌고 도는 것처럼 디스크 환자의 작은 책상에도 본연의 역할로 돌고 돈다.





빈티지 촛대, 밀랍초, 십자가상, 이솝 오일, 마당에 떨어진 솔방울, 책사고 받은 엽서, 옷 사고받은 환불 엽서까지 이쁘고 맘에 들면 책상에 가지런히 놓는다.


생활 반경이 확연히 좁아진 디스크 세계에 무엇이라도 영감이 되는 것들은 버리지 않고 나의 세계에 머무르다 가게 내버려 두는 원칙이 생겼다.





이번 달은 이런 책을 읽고 느낀 바를 남겨보려 한다.


읽고 쓰고 남기는 시간이 지금 나에게는 더없이 안전하고 온전한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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