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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May 23. 2022

근로계약서를 썼고 주임은 되지 못했다


"근로계약서 준비되었으니 총무과로 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발랄하고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을 하며 총무과로 내려갔다. 장미가 피기 시작하는 계절 5월에 이르러서야 사내에서 소문만 무성하던 근로계약서를 직접 볼 수 있었다. 2022년 1월이 되자마자 도대체 연봉협상은 언제 시작하냐던 동료들은 3월이 되어선 분노에 이르렀고(그러나 아무도 총무과에 전화하지 않았지..) 4월에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연봉 동결을 예상했는데 이게 웬걸? A4용지에 바르게 적힌 근로계약서 단어 아래 나의 작고 소중한 기본급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이게 올해 내 월급이라고?????

작년하고 달라진 게 뭐지?????

시급으로 따지면 고작 몇 백 원 올려놓고 세금은 이렇게 많이 떼 간다고??????


총무과장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내가 궁금할법한 질문에 미리 대답하고 그냥 어서 사인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내가 아무리 이런 거 잘 따지지 못하는 호구여도 그렇지. 이건 너무 했다 싶은 마음에 호소하듯 몇 마디를 보태봤지만 법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말 앞에서 법 근처도 안 찾아본 나는 할 말을 잃고 올해 내 근로계약서를 손에 쥐고 나왔다.


사실 올해는, 올해만큼은 기대를 했었다. 아무리 작은 병원이라 해도 성과도 나쁘지 않게 냈고 코로나19 시대에 환자가 미어터져 민원이 들어올 정도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공로는 진정 내게만 보였나 보다. 우리 팀장도 본인의 연봉만 확인할 뿐 나의 노고는 전혀 인정해 주지 않았으며 자기보다 많이 올라서 부럽다는 얘기만 해댔다.




입사 6년 차. 아직도 사원에 머무르며 수연님(가명)이라고 불리는 나.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온 내가 어이 없어 보였는지 옆 대리님이 한 마디를 거들었다.


자기야, 여기서 연봉 올리는 건 직급을 다는 수밖에 없어. 그러니 팀장님한테 주임 달라고 해. 그래야 월급 올라~ 다른 회사 가서도 이 나이에 직원으로 있을 거야?



마음이 굉장히 따끔따끔거렸다. 누가 그걸 모르겠는가. 나도 주임-대리-팀장 달아보고 싶다고오- 그러나 벤처회사 같이 성장 가능성이 높은 회사도 아니고 보수의 끝판왕에 서있는 병원 조직에서 월급 상승을 바라는 건 그저 오래오래 다니며 주임, 대리, 차장, 과장, 부장을 다는 게 절차임을 왜 모르겠는가 말이다. 허나 나는 6년 씩이나 여기에 다니고 있는데 아직도 사원이다. 심지어 전 회사에서보다 낮은 직급으로 들어와서 누구 좋으라고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나조차도 모를 일이다. 일과 나를 분리하자고 매번 다짐하지만 집에서도 병원을 검색하고 누락된 콘텐츠는 없는지 출근길마다 확인하는 게 나다. 어디 표시 내지 않아 그렇지 늘 나 혼자 동분서주하는 느낌으로 몸 바쳐 일하고 있는데...

여기서 나만 알고 있다.


사실 승진 기회가 전혀 없던 건 아니었다. 1년 전 팀장은 내게 주임을 달아주겠다 약속했고 나는 책임감 때문에 좀 부담스러웠지만 내심 설레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업체마다 전화해서는 직급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올 때 "그냥 직원이라고 해주세요."라고 할 때마다 솔직히 쪽팔리고 창피했으니까. 나보다 어린 나이의 직원은 벌써 주임을 거쳐 대리가 되어 이메일이 바뀌었을 때 살짝 속이 쓰렸다. 그래서 주임만 돼도 뭔가 좋을 것 같았는데...



결론적으로 나는 주임이 되지 못했다.

대신 당시 팀장은 과장이 되었고 지금은 부장이 되어 있다. 팀원 그 누구도 모르게 임명식에서 팀장의 이름이 불리고 과장 임명장을 받아 들고 나서야 나는 그의 사진을 찍으며 알았다. ‘나 물먹었구나’


윗선과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나는 이 자리 그대로, 그 분만 더 큰 날개를 달고 훨훨 윗자리로 날아가셨다. 솔직히 부장이 내게 ‘미안하다고.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얘기만 해줬어도 덜 실망했을 텐데 그날 이후 우리는 전에 있던 그 말에 대해 일절 내뱉지 않았고 그와는 거리를 두게 됐다. 친구들은 내게 먼저 물어보라고 채근했지만 왜인지 나는 그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자존심인 건지 초라함인 건지 헷갈리는 감정만 안으로 삭히면서, 누구도 그렇다 말하지 않았음에도 부장에게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스스로 납득하며 그날의 약속은 내 마음에 봉인됐다.


연봉협상, 그거 참 불편하네


워낙 남에게 아쉬운 소리 잘 못하고,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도 제대로 따지지 못하는 성격이라 나는 연봉협상이란 단어가 참 불편하다. 그냥 주는 대로 받고 그만큼 일하잔 마음이 편하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그런 성격도 되지 못해 일단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더 해내고 보자는 식이다. 그래서 연봉 협상이라는 걸 잘만 배우면 유리하게 올려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기술을 도대체 어디서 배워야 하는 건지 난감할 뿐이다.


더구나 태생적으로 스스로를 실력자로 포장하는 면에서도 굉장히 서투른 인간이니 약삭빠른 여우과보단 미련 곰탱이과에 가까운 근로자로 커 와서 누구라도 연봉협상에 대해 잘 아는 분이 있다면 기꺼이 알려주시면 고맙겠다. 협상, 아니 제안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지금 받는 월급의 액수가 조금은 높아지고 그만큼 나의 일을 더 애정하고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었을 거다.


어쩌면 연봉은 내 어깨 뽕을 높여줄 수도


돈에 얽매이지 않고 기꺼이 내 일을 사랑하며 그 직장에 온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는 열정적인 직장인을  보면 마냥 부러웠던 10대 시절이 있었다. 나도 직업을 가진다면 꼭 저렇게 일해보고 싶은 로망 내지는 존경이랄까. 아마도 예술적 직업에 더 큰 흥미를 느끼던 10대였기에 가능했을 꿈이었지만 지금도 그때 가졌던 마음이 참 순수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로망만 바라고 있을 나이는 지나버렸고 이십 대부터 친구들과 비교되는 직업과 연봉에 위축되는 일이 잦았다. 나의 가장 친한 고등학교 친구들은 대기업에 취직하고 1년에 1000만 원짜리 피부 에스테틱을 끊었고 외국계 제약회사에 들어가 첫 월급으로 프라다 가방을 사서 들고 나왔다. 또 다른 친구는 당시 금수저 남자 친구를 만나 결혼까지 해 벌써 중학생 아이를 둔 청담동 학부모님이 되었으니 고작 월급 130만 원을 받으며 작은 영세 출판사를 다닌 나로서 어찌 기가 죽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어느 날은 넷이 모여 밥을 먹고 있는데 그들은 삐까번쩍한 회사 이름을 들먹대며 이런저런 복지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나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슬슬 내 곁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직감했고 그 사실이 너무 슬펐다. 우리는 분명 한 교실에서 말도 안 되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푸르른 시절을 보냈는데 갑자기 나만 쏙 빼놓고 저 친구들만 더 높은 세상으로 넘어가는 느낌의 묘한 쓸쓸함이었다. 그제야 내가 가진 능력이 그들에 비해 보잘것없게 환산되는 게 보였다. 물론 친구들이 엄청 자랑을 하려거나 질투를 일으키려고 한 말은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그들에게 당연한 것들이 내게는 한없이 부족한 나의 능력이었고 그걸 담담히 인정하기 힘든 이십 대의 흔들리는 청춘을 지나고 있었을 뿐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직업, 그리고 연봉의 숫자는 10대의 우정을 그렇게 추억으로 남겨 놓고 30대가 되었다.  여전히 그 세계에 굳건히 있는 친구도 있고 가게를 해보겠다며 자영업자로 뛰어든 친구도 있다. 나는 높은 곳으로 뛰어오르진 못하고 나선형으로 뱅뱅 주변을 돌면서 계단 오르듯 착실하게 나아가듯 보였지만 이번 연봉협상에서 가위바위보에 져서 계단 다섯 칸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이다.

결국 내 올해 연봉은 어깨뽕을 올려주지 못했다.


연봉 금액 = 내 능력일까


너무도 당연한 말이어서 쓰면서도 민망하다. 하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물론 일을 잘하는 사람이 그에 합당한 월급을 받는 게 당연한 세상이 오길 바라고, 그러려면 일단 내가 그 연봉 협상이라는 걸 좀 잘해봐야 할 것 같다. 현재의 포지션을 높이고 업무 범위를 적절하게 할당해 놓아야 나중에 들어올 나의 후임의 연봉도 책정하기 합당할 것이다. 이제는 나만 생각하지 말고 내 뒤에 올 사람들도 함께 바라봐야 하니 첫 단추부터 잘못 꿰면 전체 연봉 기준이 다 무너지므로 계약직으로 들어와 정규직으로 이 업무를 힘들게 고정시켜 놓은 만큼 이 롤에 대한 책임감과 중요성을 지금보다 높은 연봉으로 증명해내고 싶다. (혼자서는 포부가 넘치는데 왜 총무과장에겐 어필을 못하는지?)


올해는 벌써 사인을 해놓았으니 끝났고 내년을 기다린다. 나는 과연 이 험난한 연봉협상 세계에서 무사히 연봉 계약을 할 수 있을까.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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