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장면을 연출하는 사람

내가 서 있을 장소는 내가 만들어요

by 에뜰


삶을 계획하려고 하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면 “그냥 되는 대로 살아도 되지 않나” 하며 세상괴 타협하게 된다. 하지만 그 지점을 좀 더 산뜻하고 멋지게 넘어설 수 있다면?


일상에서 내가 서 있고 싶은 장면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한 장면, 한 장면을 감독과 배우, 수많은 스태프가 끊임없이 고민한다. 의도에 맞게 표현하기 위해 사소한 선택에도 공을 들이는데 차 한 잔을 입에 대는 순간조차 그렇다. 인물 뒤 배경은 어떤 풍경이어야 하는지, 컵은 꽃무늬인지 땡땡이인지, 오른손인지 왼손인지. 컵을 드는 손을 가까이 잡을지, 조금 멀리서 담을지. 관객에게 어떤 분위기와 목적을 전달할지를 염두하여 장면은 세심하게 조율된다.


그렇다면 작업일 수 있겠다

사는 일도


바람 따라 강 따라 흘러가는 대로 힘을 빼며 살 수도 있지만 각자가 사는 이유를 스스로 선택해 적극적으로 만들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직접 만들기로 했다.


내가 만들어낸 일상의 장면은 행복을 준다. 스스로 만든 위로 장치 같은 것이다. 봐도 봐도 좋은 것들을 곁에 두고 사진을 찍어 이렇게 긴 글로 남기기도 하고, 짧게 휘발하기도 한다. 어쨌든 내가 존재하고 싶은 한 장면을 상상하고 실제로 구현해 내는 일, 그리고 비슷한 감도로 그 순간을 살아내는 일은 결국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강력한 동기를 만들어내는 일이고 그것은 나의 삶을 좀 더 단단하게 다지는 역할을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디에 서 있고 싶은 사람인가.

내가 원하는, 내가 있을 장소의 모습은 어떤 모양인가.



/ 내가 보고 싶은 장르나 환경을 바라지 말고 내가 그 장르의 첫 번째가 되자고 생각했어요. 나는 일하는 시간이 많으니까 일하는 장소가 너무 중요했고 그럼 나는 어떤 손님들을 보고 싶었고 어떤 장소에 내가 서 있었으면 좋겠고 그렇게 메타인지로 봤을 때 내가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고, 이런 게 명확했어요.


/ 그리고 그런 장소가 왜 세상에 없지. 왜 멋없게 이런 장소 하나 안 만들어주는 거야. 할게 아니고 내가 원하는 장소는 내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인터뷰를 보는데 확 와닿았다.

내가 존재하고 싶은 일상의 장면을 직접 만들어 보자고. 하루의 장면을 연출하는 연출가가 되어보자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

1 / 비전보드를 만드는 사람


일상의 장면을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비전보드. 앞으로 1년 동안 나는 어떤 목표를 가지고 무슨 방법으로 그것을 성취해 낼 것인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이다. 미래를 예언하기보단 내가 매일 서 있고 싶은 자리를 현재로 끌어오는 지도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나는 크게 건강, 침묵, 기세, 커리어 네 가지 분야로 나누고 건강을 위해 필라테스를 토요일에도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조금 더 신중한 사람이 되기 위해 쓸데없는 주변의 관심엔 침묵하기로 했으며 움츠러드는 자존감을 스타일링으로 극복하고 고민만 하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도록 먼저 시작하고 피드백을 수용하면서 빠르게 커리어 실력을 쌓기로 했다. 이렇게 글로 쓰면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목표를 일상의 장면으로 전환하기 위해 비전보드로 만들어 두고 책상을 오갈 때마다 바라본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

2 / 책을 자주 만지는 사람


책이라는 물성을 좀 더 감각적으로 다루는 하루를 원했다. 책은 읽는 텍스처이기도 하지만 페이지의 결이나 묵직함 같은 감촉으로 먼저 다가오는 물건이기도 하다. 동시에 손에 품는 것만으로도 지적인 이미지를 완성시키는 소프트한 소품이기도 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책이 가진 이 역할은 꽤 흥미롭다. 어떻게 곁에 두고, 어떻게 들고, 어떻게 펼치느냐에 따라 책의 몰랐던 매력을 증폭시킬 수 있으니까. 나는 책의 품성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사람임을, 일상에서 자주 느끼고 싶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

3 / 파란 배경을 가진 사람


어느 날 아침, “바로 그거야” 하고 집 밖을 뛰쳐나갔다. 버스를 타야만 갈 수 있는 문구점에 들러 짙은 파란색 종이를 사 왔다. 자주 앉아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서프 테이블 뒤 벽에, 그 파란색을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종이는 꼭 은색 프레임 액자에 끼워야만 했다. 그래야 내가 상상한 장면에 꼭 맞았다.


나는 글을 쓸 때 묵묵히 타이핑만 하느라 고개를 자주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 등 뒤에는 짙은 파랑의 액자가, 마치 내 인생의 배경처럼 걸려 있어야 했다. 파랑을 어깨에 얹은 내 모습은 꽤 진중해 보이기도 했고, 열렬히 글을 사랑하는 작가의 자세를 슬며시 부추기기도 했다. 말하자면 어떤 기운, 에너지, 기세 같은 것. 내가 원하는 배경을 내가 먼저 만들어 두는 일이다. 나는 언제나 파랑을 등지고 문장을 앞으로 밀어낸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

4/ 쓸데없어도 기록하는 사람


나는 유용한 것만 적는 사람이 아니라, 쓸데없는 것도 적는 사람이고 싶다. 오늘 들은 이상한 문장, 골목에서 맡은 냄새, 누군가의 웃음이 끝나는 속도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은 당장 어디에 쓰이진 않지만, 내 하루의 질감을 지키는 데는 꼭 필요하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

5 / 영화 한 장면에 데려 놓을 줄 아는 사람


가끔 영화 주인공이 되길 꿈꾼다. 그러나 영원히 이뤄질 수 없는 이야기. 가끔 여행을 떠나면 마치 주인공처럼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다. 비슷한 하루를 다른 렌즈로 바라보는 거다. 삿포로의 눈은 그걸 가능케 했다. 비록 얼굴 생김새는 다 가렸지만 내리는 눈을 맞으며 조용한 한 컷을 남겼다. 기분이 좋았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

6/ 집에서도 시계를 차는 사람


집에서 손목시계를 찬다는 건 이상하게도 나에게 ‘태도’에 가깝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시간을 몸에 두르는 일. 이 형식이 나를 흐트러지지 않게 잡아 주는 느낌이 좋다.


내가 서고 싶은 장면은 집 안의 아주 사소한 순간이다. 주방에서 물을 끓이고, 창문을 열고, 빨래를 널고, 책상에 앉는 순간. 그때 손목에 시계가 있으면 나는 생활을 “대충 흘려보내지 않는 사람”이 된다. 시간에 쫓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존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기꺼이 즐거운 작업이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

7/ 집 안에 신성한 영역을 만들고 싶은 사람


종교가 어디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낸 시간을 멈춰가는 의미로 작은 제단을 만들어 기도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기도는 꼭 두 손을 모으는 것만이 아니다. 성모상 앞에 초 하나 켜놓고 음식을 만들거나 청소를 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음악을 듣거나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있다. 오로지 모든 행위가 기도다.


작은 제단에 빨간 액자를 둔 이유는 여기에서만큼은 빨강은 화려한 유혹의 색이 아니라 나를 현재로 붙들어 두는 색이 되기 때문이다. 집안을 오며 가며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잊지 않기 위한 나름 회심의 인테리어인데 어딜 가도 눈이 쏠릴 수밖에 없어서 명상하며 절제하는 신성한 영역을 한 번이라도 더 의식한다.


잘 만들어낸 일상의 장면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조용히 쌓아 올리는 기록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