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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Apr 18. 2019

스페인 하숙은 왜 그릇에 신경 쓸까?

살림, 문장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금요일 밤, 즐겨 보는 프로그램 세 가지가 있다. '스페인 하숙' '막돼먹은 영애 씨' '나 혼자 산다'이다.

특히 스페인 하숙은 볼 때마다 여러 생각이 드는 예능으로 남편은 퇴사 후 순례길을 상상하며 비용도 슬쩍 알아보고 그곳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스타일링을 보기도 한다. 나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 순례길을 다니는지 (내가 갈 생각은 없다), 배우 유해진이 만드는 이케요가 궁금하다.


몇 번 보다 보니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원래 나영석 PD 프로그램에 cj ppl이 많이 들어가긴 했지만 이번엔 무심한 듯 신경 쓰는 그릇의 정체들이다. 사실 '뭔 순례길 하숙집 부엌이 저렇게 이쁠까' 의아했어도 어쨌든 방송이니 엄청 꾸몄나 보다 했는데 그릇은 좀 의외였다. 기존의 '삼시세끼'에선 자급자족이 포인트여서 그릇이나 냄비가 돋보이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반찬 하나하나 담을 때 배정남과 차승원의 고심이 엿보인다.  진미채를 담을 때도 가지런히, 고명도 색색에 맞게 담는 이들을 보노라면 하숙집에서 왜 그리 그릇에 신경을 쓸까 궁금하다.


이제는 1인 가구가 늘고 취향이 다양해지면서 혼자 밥을 먹더라도 잘 꾸미고 차려먹자는 시대다. 그래서 홈 인테리어 상품도 늘고 각자 취향에 맞게 꾸며진 집들을 온라인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나도 집 꾸미고 정돈하는 것을 즐겨 하지만 하면 할수록 영 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요리다. 음식에 관해 너무도 취약해서 남은 반찬을 잘 응용할 줄도 모르고, 냉장고 파먹기는 더욱 힘들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버리는 음식도 상당수. 다행히 남편은 먹는 걸 좋아해 이것저것 요리하기를 즐기는 편이라 이제는 마음 놓고 음식 담당은 남편몫이 돼버렸다. 하지만 플레이팅은 종종 내가 하는데 이왕이면 음식이 더욱 맛깔나 보이도록 고운 접시에 소복하게 담아내어 먹고 싶기 때문이다.

신혼살림으로 들인 첫 그릇은 다 흰색이었다. 국/밥공기, 반찬 그릇 모두 다 할 것 없이 가장 기본적인 흰색을 골랐다. 그 후로 한 두 개씩 색이 있는 그릇을 들이고 최근에는 나무 소재로 된 걸 써보고 싶어 고심 중이다. 밥도 잘하지 않으면서 자꾸 그릇 욕심이 생기는 걸 보니 인스타용 밥 사진을 남기고 싶은 허영심은 아닌지 고민되지만 하나 둘 사모으면서 조금씩 알 것 같다. 단순하게 음식을 담는 용도가 아닌 나의 정성을 내보이는 게 플레이팅이란 것을.


전적으로 내 생각이지만 스페인 하숙에서 그릇에 신경 쓰는 이유는 ‘순례자를 위한 밥상’이기 때문인 것 같다. 하루에도 몇 킬로씩 걷다 지친 사람들이 허기를 채우는 곳. 몸과 영혼에 짜증이 덮쳐올 때 정갈한 그릇에 잘 차려진 밥상을 보면 위안이 된다. 특히 밥심이 곧 힘인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구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배우의 플레이팅 고심은 그동안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위로하고 그대들에게 보내는 정성과 안부를 직접 표현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유독 지치고 힘든 저녁, 밥 하기도 너무 귀찮을 때 라면 봉지를 뜯는다. 끓인 물에 스프와 라면을 넣고 떡, 치즈, 파도 있으면 송송 썰어 넣는다. 작은 냄비채 먹을까 싶다가도 쨍한 파랑 그릇에 부어 빨강 국물이 더욱 돋보이게 하고 김치도 락앤락 그릇째 놓지 않고 작은 유리그릇에 담아 내 먹는다. 비록 인스턴트 라면일지라도 당시 내 체력에서 최선을 다해 스스로에게 정성을 보이는 것이다. 뭐랄까, 나를 막살게 내버려 두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존중해 주었다고 해야 할까?

살다 보면 모든 게 귀찮아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물론 에라 모르겠단 마음으로 그냥저냥 지낼 때도 있지만 한 번 만 더 긍정적인 기운을 끌어올려 그 순간의 나를 소중히 다독이는 하루도 있다.


그렇게 라면을 먹고 투명한 유리컵에 물 한 가득 따라 꿀꺽 마시면 오늘 하루 잘 살아냈다는 안도감이 따른다. 몸을 생각해 좀 더 영양가 있는 밥을 먹었다면 좋았겠지만 도나 캐나 컵라면을 때운 내가 아니니 괜찮다. 나름 나를 존중하게 여겼으니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밤.


그릇은 이런 힘이 있다. 눈에 보이게 존중하고 격려하는 힘. 당신을 잘 대접하고 싶은 나의 마음. 나 또한 내게 손을 내밀어 다독여 주고 싶은 시간. 이럴 때 우린 먹을 걸 준비하고 좋은 그릇에 내놓는다. 말없이 전해지는 표현으론 한참 부족하다 느껴질 때 내가 가진 가장 이쁘고 좋은 그릇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정신적 허기를 채우러 오른 순례길에서 밥은, 그것도 내 나라의 음식은 육체적 고달픔을 맘껏 달래는 원동력 같은 그런 것일게다. 저마다의 짐을 어깨에 지고 필요 없는 것들을 하나씩 벗어가며 떠난 그 길에 어찌 행운을 안 빌 수 있을까. 아마 나였어도 물 한 잔 고운 컵에 담아 무사히 그 길 끝에 닿기를 응원하겠지. 옛 선조들이 물 바가지에 나뭇잎 하나 띄워 나그네에게 건넸던 것처럼.


buen camino! (부엔 카미노!)

당신이 가는 길에 행운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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