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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Jul 09. 2019

시시콜콜한 것만이 살아남는다.

살림, 문장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 날이었다. 딱히 누가 괴롭힌 건 아니지만 은근 기분 나쁘고 축 처진 그런 날. 누구든 날 건드리면 힘 없이 픽 쓰러질 것 같은 그런 날.


집에 돌아와 소파에 털썩 누워 넷플렉스를 아무거나 튼다. 나 말고 다른 것에 눈을 돌려 감정을 소멸해야 하므로 우연히 눈에 들어온 영화를 재생한다. 한 여자의 어두운 시선이 흑백 영상에 반짝인다.


인트로는 바닥에 뿌려지는 물과 거품들. 누가 바닥을 청소하는 건지 체감상 1분 넘게 그 장면을 응시한다. 물 위에 반사된 하늘, 스피커에서 들리는 생활 소음이 영상 속을 꽉 채운다. 기운은 없는데 묘하게 계속 보게 되는 이상한 영화. 바로 '로마'였다.


중산층 하녀인 클레오는 부부와 네 아이, 한 명의 할머니가 사는 대가족을 보살피는 가정부다. 아침이 되면 마당에 개똥을 쓸고, 부엌에서 요리하고, 청소하고, 마지막으로 자러 방에 올라갈 때 집안의 모든 조명을 소등하는 일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집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챙기고 일하는 사람. 그래서인지 클레오의 바닥을 쓸고, 허리를 굽혀 아이를 돌보는 모습, 계단을 오르내리며 빨랫감을 거두는 일상적 노동이 낯설지 않다. 시대와 배경은 달라도 그때도 시시콜콜한 일은 있었고, 누군가는 그것들을 해결해야 했으니까.


회사에서 처음 좌절감을 맛본 날이었다. 전화로 예약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는데 뭔가 매끄럽지 못했다. 사실 별일 아니었는데도 초짜같이 모든 걸 망쳐버렸다는 스스로의 자책이 큰 거였다. 누가 들으면 "에게, 겨우 그런 것 같고 뭘 그래?" 하며 코웃음 쳤겠지만 정작 내겐 그렇지 못한 아주 시시콜콜한 일이었다.


집 안의 모든 걸 꿰뚫고, 해야 하는 일을 일정한 리듬으로 해내는 클레오에 멍하니 빠졌던 것 같다. 비록 하녀지만 간간히 데이트하는 애인도 있고, 함께 일하는 친구와 재밌는 이야기도 하고, 돌보고 있는 어여쁜 아이들과의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클레오가 언뜻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삶의 변주곡이 시작되는 점은 집주인 부부가 이혼을 하고, 클레오는 도망간 남자 친구의 아이를 임신하는 일이다. 한 여성은 바람난 남편을 보낸 상실감을 뒤로한 채 어떻게든 네 아이와 클레로를 거둬 먹여야 하고, 클레오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일상의 두려운 변화를 마주해야 한다. 이 시기에 두 여성의 연대는 더욱 단단해지며, 가정을 벗어나지 않고 일상을 이어가려는 소소한 변화가 이뤄진다.


결국 클레오는 아이를 잃고 만다. 영화에선 시대적 비극 때문에 생긴 어쩔 수 없는 일로 표현되지만 결국 클레오의 입에서 묵묵히 받아들일 수 없던 삶의 울음이 터진다.


"사실은 그 애를 원치 않았어요. 아이가 태어나지 않기를 바랬어요."


휘몰아치는 파도를 묵묵히 맞으며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견딜만하니까 그렇게 사는 걸 거라고.. 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삶도 자세히 보면 희로애락이 순간순간 겹치고, 좋아 보이기만 한 타인의 일상도 멀리서 보면 작은 점들로 이뤄진 평범함이다.


우리 생활도 마찬가지일 곳이다. 평온했던 어제가 오늘도 이어지리란 법은 없다. 갑자기 마주친 두려운 상황에 이리저리 치여도 시간이 흐를 뿐. 겉으론 그 일을 묵묵히 체념한 듯 보여도 속은 문드러지고 불안함이 요동친다. 그래도 우리가 계속 살아가는 이유는 시시콜콜한 반복적인 일들이 나를 다시 일으킨다는 점이다.





어려운 시기임에도 일상은 계속된다. 아침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널기 위해 옥상 계단을 오른다. 이런 작은 소소한 일이 생활을 소란스럽지 않도록 정돈하며, 흐르는 시간을 제 할 일로 채운다. 그러면 이제 시간이 일할 차례다.  


바다에 빠진 아이를 구하러 맨 몸으로 성난 파도를 헤치는 클레오는 그제야 자신의 삶을 위로하는 듯 보인다. 힘들고 우울했던 날을 비껴내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였던 그녀에게서 내 열등감이 보였다.


'나는 지금 별 것도 아닌 일을 요란하게 여기고 있지 않은가. 조금 더 담백하고 묵묵하게 하루하루를 껴안을 순 없는가.'


영화를 다 보고 운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사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쓰면서도 도대체 왜 이 영화가 그 날의 내 마음을 건드렸는지 알지 못한다. 단지 클레오의 덤덤한 눈빛이 괜찮다 말해줬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모호하고 불안했던 그 때의 감정이 클레오의 바닥 청소와 함께 쓸렸기 때문일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나는 원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소설을 읽다가도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나오면 신이 난다. 청소를 하고 옷을 다리고 냉장고를 정리하고 요리를 하는 이야기 등. 그런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이상하게 안심이 된다.


 



시시콜콜함은 일상의 안정을 준다. 또한 편한 옷을 입고 소파에 누워 영화에 빠져드는 이토록 소박한 시시콜콜함은 내일도 잘 살아내리라는 안심이다. 일상을 부여잡고 앞으로 나아갔던 클레오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보기로.





<사진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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