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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Oct 20. 2019

직장은 하나요, 직업은 여러 개

일을 함께 해본다는 것

 여러분이 생각하는 병원엔 제일 먼저 어떤 직업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의사와 간호사가 주를 이루겠지만 의외로 병원엔 일반 행정부서 직원도 꽤 존재한다.


 고객관리부, 총무부, 홍보부, 재무부, 구매부, 시설부, 관리부, 미화부, 영양실, 의무기록사, QI 등등등


 적게는 한 명부터 많게는 5-6명까지 팀을 이뤄 조직적으로 병원 운영을 이끈다. 환자 입장에선 병원이 치료만 잘하면 장땡 일지 몰라도 근로자의 입장에선 진료는 기본이요, 월급 밀리지 않고 사내 폭력이나 갑질에서도 응당 보호받아야 할 조직일 뿐이다.


 즉, 생명을 살려야 할 병원 건물이 의사와 간호사만 있다고 굴러가는 게 아니라 각 행정부서도 일이 있어야 돈을 버는, 결국은 직장이란 이야기다.


 나는 작은 중소병원의 행정부서 계약직 직원이다. 몇 달간 주 업무를 파악하고 일이 손에 익숙해질 즈음 병원 인증 준비를 돕게 됐다. 병원 인증이라 함은 보건복지부에서 이 병원은 여차 저차 해서 믿을만한 곳이라고 인정해주는 건데 하도 여기저기 많이 쓰여서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된 것도 없지 않다.


“그거 돈만 있음 다 따는 거 아니야?”

“개나 소나 다 받는 그거?”

“인증병원이면 더 비싸기만 하지 않아?”


 어느 말은 맞고 어느 건 틀렸다. 일단 돈이 있으면 인증 준비하는 게 훨씬 수월하지만 돈만 있다고 해서 수많은 규정과 절차를 만들 수 없고, 그래서 개나 소나 다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더 비싼 진료비를 내야 하는 것 아니냐 또 물으신다면 보험이 안 되는 고난도의 수술과 약값만 아니면 인증병원의 진료비가 특출 나게 비싸지도 않다는 점이다.


 다만 인증을 따면 홍보에 사용하기 좋고, 환자 입장에서도 체계적인 진료와 입원 및 여러 요소의 시스템을 경험할 수 있다.


 병원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감염' 그리고 '화재'다. 거기다 최근에는 '개인정보 관리'도 더해졌다. 물론 모든 병원이 그런 건 아니지만 인증 준비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이다. 그래서 손 위생 모니터링도 있고, 실제 조사위원관들은 간호사에게 손 씻는 방법(그렇다. 방법이 있다. 무려 1분간 손바닥-손등-손가락 사이사이까지 씻어야 한다.), 화재 시 구조 활동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고 그에 합당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점수가 많이 깎인다.


 그러니 여러분이 어느 병원에 갔는데 인증을 받았다고 한다면 거긴 적어도 까다로운 규정과 절차를 해낼 만큼의 자본과 운영진들의 노력이 충분히 들어간 곳임을 아셨으면 좋겠다. 하다못해 소화기 위치가 잘 표시되어 있는지 쓰레기통 뚜껑은 잘 닫혀 있는지 병원의 0.0000001까지 관리하고 확인한 병원이기 때문에 환경만큼은 환자도 만족할 거라 생각한다.


 아무튼, 이런 배경 설명은 뒤로 하고 나의 병원 인증 경험은 처음인데 그동안 몰랐던 진료파트의 속사정과 행정부서의 결합이 돋보인 시기였다 말할 수 있겠다. 그동안 내가 봐온 병원이 부서 간 네 일, 내 일을 철저히 나누고 조금도 손해보고 싶지 않은 태도를 고수하는 모습이었다면, 이번 만은 공동의 목표가 있어서 그랬는지 한 배를 탄 진지한 눈빛이 보였달까.


 계약 직원인 나는 회사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어서 '그냥 내 일만 해야지. 남 참견 안 하고 조용히 일 하다 퇴근해야겠단' 생각으로 보낸 몇 달이었다. 소속이 병원이었지만 행정일을 하루 종일 하고 있으므로 의료진을 대할 일 없어 일반 기업에 다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당연히 타 부서 직원들에게도 별 관심 없었을뿐더러 그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여러 팀이 모여 병원 인증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좀 감동을 받았더랬다.


어떤 일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일을 하느냐에서 격차를 깨닫고 나면, 세상엔 '단순 업무'란 사실상 없고 타인이 일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정한 구원)



 다들 계산기나 두드리며 대충 시간만 때우는 즉, 나 같은 직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환자와 보호자 입장에서 규정을 바꾸려는 간호부의 노력, 병원 세탁물 관리와 주차 시설을 편하게 바꾸려는 관리부의 계획, 팀 업무를 철저히 파악하고 그의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눈빛과 표정, 몸짓에서 처절하게 드러났다.


치열했던 거다.



 모든 것을 좋게 바꾸는 건 쉽지만 그건 재정적, 물리적 환경이 충분한 뒤에나 가능한 거고, 내가 속한 조직이 많이 부족하면 손에 갖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어떻게든 굴려봐야 한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 보는 행동이 변화를 이끄는 것이다.


 공동의 목표가 눈에 보이니까 나부터 달라졌다. 전에 같으면 건조하게 했을 일을 진심으로 그들이 잘 되게 도와주고 싶어 졌다. 인증 시기가 당장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힘들어도 각자 일터의 최전선에서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노력을 보이니 꼭 따고 싶었던 거다.


 실제로 인증을 준비하는 일은 참 어려웠다. 간호사들은 병원에서 인증 준비한다고 하면 퇴사를 하거나 아예 입사를 고려할 정도로 일은 일대로, 준비는 준비대로 해야 하는 업무의 연속인데, 실제 준비하면서 우는 직원들도 여럿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눈물을 닦고 고쳐야 할 사항을 타 부서와 싸우면서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회의실에 모이면 날 것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듯했다. 수술 시 감염 관리를 논하고, 드레싱의 완벽함, 환자 안전을 철저히 단속하고자 머리를 맞대어 다 같이 고민하고 언쟁하며 하나씩 바꿔 나갔다. 도저히 안 될 것 같던 규정과 절차들이 차근차근 바뀌고 엉성하기 짝이 없던 조직 관리도 점점 탄탄해졌다. 내 이익이 아닌 공동의 목표를 손에 쥐려는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일 하는 게 설렜다.



 조직의 한 구성원으로 치열하게 일하는 동료의 얼굴을 보니 일 하는 게 설렐 정도였다. 나는 뭘 도울 수 있을까, 진심으로 조직원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규정을 프린트하고 붙이고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모두 본인의 몫을 해가며 일주일간 야근을 했다. 차가워진 공기를 맞으며 다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 함께였고, 서로 몰랐던 사람끼리 농담도 해가며 조금만 더 버티자는 격려 말도 좋았다. 그동안은 내 일만 하느라 바빴지만 이제는 한 배를 탄 사람끼리 저 먼 육지에 도착해야 했으므로 서로 주고받는 시너지가 추진력이 되어 배를 밀었다.


 작은 파티션 아래서 컴퓨터만 보다가 병원이 돌아가는 현장을 두 눈으로 보는 경험은 몸으로 일을 체득하기에 더없이 소중했다. 모든 직업이 견고해 보였다. 어디 하나 작은 일 없고, 큰일이 없다. 의사가 아무리 똑똑해서 수술을 잘해도 간호사가 그 후 관리를 못하면, 관리부가 삐걱대는 침대를 당장 고치지 않는다면 병원은 살아남지 못한다. 한 개의 직장에서 여러 직업이 연결되어 서로의 일을 퍼즐처럼 맞춘다.


 새삼 나만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란 걸. 다른 직업들이 모여야 한 직장이 돌아가는 걸 눈으로 확인한 시간이었다. 좁은 시야로 내 일만 바라봤던 몇 달이 몇 주의 팀워크에 참여한 뒤로 조금 달라졌다. 수백 장의 서류를 정리하고, 전산을 점검하며 환자 개인정보 프로세스를 만드는 동료의 작업을 보는 것만으로 내 일을 잘해보고 싶었다.


다시 단순한 업무로

 드디어 인증 기간이 끝났다. 다시 뿔뿔이 흩어져 우리는 각자의 업무 속에 지내고 그때의 빛나던 얼굴은 없어졌다. 나는 다시 행사를 위해 3만 원 이하의 음료와 다과를 고르고 영수증을 올리고, 환자 게시판을 만들기 위해 줄자로 사이즈를 재고 내용을 쓰고 수정하는 사사로운 업무로 돌아 왔다. 매일 들던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지?” 회의감은 드문드문 찾아온다. 다만 내 일이 병원이 굴러가는데 중요한 역할은 아니라 해도 이것이 내 직업이요, 해야 할 일임을 받아들이면 하늘 아래 그냥 그런 직업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들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 믿을 뿐.


 이걸 알고 일 하느냐, 모르고 하느냐의 차이는 꽤 컸다. 그럼 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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