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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Oct 22. 2019

이상한 논리로 설득이 되는 ‘영화 조커’

영화는 영화, 현실은 현실

배트맨도 발음이 헷갈려 베트남으로 부르면서 영화 조커를 본 건 순전히 댓글 하나 때문이었다.


<영화 보다가 너무 우울해서 중간에 뛰쳐나왔어요.>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약간의 우울한 면을 좋아하는 내게는 흥미를 당기는 한 줄 평이었다. 조커를 연기한 배우가 여럿 있지만 내 기억 속 조커는 펭귄 모습에 우산을 펼치고 위에서 아래로 뛰는 모습(?)의 어떤 영화, 아무튼 기억 안 나는 꽤 오랜 전 이야기다. 그러니, 그 유명하다는 히스 레저 조커도 본 적이 없는 나는 이번 영화가 첫 조커인 셈이다.


아, 불편한 영화다.


 첫 장면부터 불편했다. 보지 않아도 내 이마가 꽤 찌그러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조커는 우울한 삶을 살고 있는데, 이 원인이 배려 없는 주변 사람과 사회에 있다는 게 너무 화가 났다. 주변인들의 무관심과 무신경이 무례함을 허락하는 불쾌함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랑 너무 똑같아서, 바뀌지 않을 거란 절망이 영화에서 현실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게 불편했나 보다.


열심히 살고 싶은데 아무도 봐주지 않아


 

 한 줄로 적기만 했을 뿐인데 앞에 큰 벽이 세워진 것 같은 막막함이 느껴진다. 삐에로가 직업이고, 코미디언을 꿈꾸는 지망생이 하필 정신질환자이고 남들과 웃음 포인트가 달라서 외면받는 게 안쓰러우면서도 슬프다. 제 딴에는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자꾸자꾸 상상을 해보지만 결국은 망상에 이르는 현실이 너무도 차갑게 다가온다. 세상에 태어나 좋은 기억은 하나도 없고 오직 나쁜 기억만 있다고 말하는 장면은 불행이 줄지어 따르는 그의 삶에 가장 진솔한 고백처럼 보인다. 그나마 좋았던 기억도 결국 그의 망상에 따른 허구인 걸 보면 그래도 마음 한편에 타인의 친절과 배려를 계속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기득권층의 무례함, 심화되는 양극화, 폭력, 정신질환, 숨겨 놓은 출생 비밀까지 모든 경험이 불행인 사람 아서  플렉은 점점 이상한 논리로 악당 조커가 되는 당위성을 부여받는다.


이상한 논리로 설득되는 영화



 사람을 죽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조커에게 감정이입이 된다는 건 좀 충격이었다. 공감 능력 제로에 존재감도 없던 그가 사람을 죽여 하층민과 노동자의 영웅이 되는 이상한 현실이 꽤 그럴듯하게 다가왔다. 청소년들에게 맞을 때도 그 누구 하나 손 내밀지 않는 거리, 마음속 우상이었던 사람에게서 모욕을 받는 모습, 웃음을 강요하며 삶을 방치한 엄마까지.. 이 모든 사실을 가까스로 버텨내며 약을 먹고 정신과 상담을 받는 아서 플렉의 노력은 모래 위 쌓은 성처럼 금방 허물어진다. 그래서 한 명도 손잡아주지 않는 현실에서 내면의 광기가 극에 달해 이제는 살인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우아한 춤을 추는 조커가 멋있어 보일 수밖에 없다. 이로써 하찮은 인간이 최고의 악마가 될 서사는 쓰였고, 이상한 논리가 기적의 논리로 바뀌었다.


기적의 논리를 다시 해체해야 할 때


  

 깜빡하면 속을 뻔했다. "불쌍한 아서 플렉이 그렇게 된 건 다 정신병이랑 그에게 무관심한 사회 때문이야."라고 순진하게 믿을 뻔한 거다. 우리는 자세히 그리고 더 면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타고난 성격이 어떻고, 환경이 어떻든 폭력과 살인을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모든 결과에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이유가 있다. 누군가 내게 모욕을 줬다고 해서 그를 어떻게 할 순 없다. 그건 나의 도덕적 의식이 본능의 멱살을 가까스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대개 우리는 이렇게 다 같이 살도록 규율을 교육받고 사회적 태도를 몸에 새기며 자라왔다. 물론 아서 플렉은 이 기초적인 교육마저 받지 못한 것 같아 우리도 모르게 악당이 될만한 당위성을 부여해 주었지만 이 논리는 잘못되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쨌거나 자기 합리화의 경계 안에서 이뤄지는 무지막지한 범죄일 뿐 세상을 바꾸는 무기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중요한 건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을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개인이 궁지에 몰려 이웃에게 불행을 넘기지 않게 사회가 뭔가를 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상한 논리가 영화의 매력을 충분히 살렸으니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배우의 연기, 감독의 연출에 혀를 내두르며 조각조각 쌓아 올려진 기적의 논리를 천천히 다시 살펴보고 싶을 뿐이다.


 다만, 이상한 논리가 기적의 논리가 되는 건 지극히 영화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어야 하는데, 어쩐지 현실에서도 이런 장면을 자주 보게 되어 안타깝다. 누가 봐도 이상한 일들이 당연한 것들이 되는 곳에 내 옆에 조커가 있다 해도 의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영화는 영화, 현실은 현실인 세상에서 살 순 없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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