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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Nov 12. 2019

생각은 무슨, 그냥 하는 거지.

 어릴 때 늘 했던 기도 중 하나는 "무조건적인 용기를 주세요."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뭐라도 할 수 있는 용기만 있으면 짝사랑하는 그 애한테 말도 걸고, 먹고 싶은 피자도 혼자 가게에 들어가 마구 마구 먹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과 눈치만 빤한 나는 돌다리만 백번 두들기다 그것도 못 건너는 소심하고 예민한 소녀였다. 한 가지 걱정되는 일에 지나치게 매달려 속이 아프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수많은 일에 짜증을 내는 사람. 어리면 어려서 그랬다치겠는데 문제는 나이 서른을 넘겨도 의연한 어른이 되지 못하고 그저 그런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다. 몸이 컸다고 생각과 용기가 함께 커지지 않았고 오히려 생각 끝에 포기만 많아졌다.


생각은 아무 힘도 없다.


 불편해서 싫은 일, 잘 해낼 자신은 없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생각보다는 일단 행동해야 하는 걸 서서히 깨우치고 있다. 생각은 아무 힘도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잘 해낼 수 있을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는 늘 존재했기에 애초에 완벽한 시나리오는 없었다.


 내가 늘 머릿속으로 이 생각이란 놈만 붙잡고 살면서 혼자 서울대도 가고 좋은 회사 다니며 엄마한테 용돈도 척척 주는 딸이라는 건 아무도 모른다. 당연히 현실에서 이뤄진 게 아닌 헛된 나의 꿈이니까. 내가 만든 환상의 꿈들은 현실의 나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지금도 나의 생각은 또 꿈을 꾼다. '퇴근하고 집에 가면 유튜브 보면서 홈트 해야지. 운동하고 씻고 정성스럽게 밥을 차려서 맛있게 먹어야지.' 집에 도착하면 다시 생각은 생각을 바꾼다. '조금만 쉬었다 하자. 힘들어.' 그러다 잠이 들면 '내일은 꼭 하는 거다.'잊지 않고 생각은 또 생각을 한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 생각이란 놈은 늘 혼자 바쁘고 열정적인데, 몸의 의사는 전혀 물어보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게 문제다. 생각이란 걸 안 하고는 살 수 없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면서 (스트레칭을) 하세요?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김연아 선수의 유명한 짤이다. 쿨하다 못해 건조하기까지 한 저 대답은 나 같은 '생각순이'에게 너무도 충격적이고 심플한 삶의 태도였다. 그냥 하는 거라니... 너무 오랜 훈련으로 몸이 알아서 먼저 반응한다는 것일까?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짜인 연습량을 바로바로 소화하는 걸까?


 최근 이 짤에 대한 좀 더 자세한 기사를 보니 당시 속마음은 "아 집에 가고 싶다. 졸려 죽겠다.."였는데 솔직하게 말할 수 없어서 그냥 한다고 대답한 거라고 한다. 어쨌든 결국 스트레칭하면서 별 생각이 없었다는 건 마찬가지인 건데 그동안 퀸 연아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던 수많은 연습이 꼭 금메달 따야 한다는 목표보단 그날의 할 일을 충실하게 하다 보니 그 자리까지 올랐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이런 태도만으로도 충분히 완벽한 거였다.


행동은 힘이 세다.


 말보다는 실천, 생각보단 행동이 훨씬 힘이 세다. 생각처럼 번잡스럽지 않고 ‘조용히 묵묵하게 일하는 움직임은’ 원하는 바에 도달할 수 있는 든든한 두 다리다. 두 갈래 갈림길에서 생각은 이리 갈지 저리 갈지 고민하는 사이, 행동은 단번에 내가 선택한 길의 끝을 향해 걷는다. 한치의 의심 없이 간다면 좋겠지만 그 사이 생각이란 놈이 가만 두지 않고 쫑알쫑알거리니 걸으면서도 불안하다. 그래도 걷는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초조하게 걱정하는 날보다 훨씬 생기가 돈다.

오르막과 내리막, 거친 돌밭도 지나면 생각과는 다른 길 끝에 도착해 있다. "거봐, 결국 안 됐지?" 실망스러울 법도 하지만 이상하게 속이 시원한 건 직접 내 한계를 느낀 안도감일 것이다.


 예전에는 내 한계를 확인하는 일이 두려웠다. 너무 많은 생각과 잡념이 나쁜 결과에 대한 깐깐한 논리를 내민 탓이다. 이건 이래서 못하고, 저건 저래서 못하는 증거만 늘어 어느 순간에는 단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한 날이 많았다. 신입인데 기획서 빠꾸 당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일을 못해서 선배에게 쓴소리를 듣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건데 모든 게 내가 무능하고 못나서 생긴 일 같았다. 많은 이유가 불안이 되고 의심이 커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점점 쪼그라들었다.


하고 싶은 일, 구경만 하려고?


 런던 킹스 컬리지 학원에서 영어 공부를 가르쳤던 선생님이 나랑 나이가 비슷했을까? 귀엽게 생긴 얼굴에 손톱엔 빨간 매니큐어를 칠하고 부스스한 머리를 매만지며 우리의 단어 시험을 채점하고 있었다. 그리곤 늘 웃으면서 자기는 여기서 외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 참 재밌다고, 나중에 선생님이 되고 싶은데 지금의 경험이 큰 재미를 가져다 줄 거라고도 말하며, 어제 술을 너무 마셔서 오늘 너희 단어 시험은 모두 100점을 줬다는 말도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당시에는 선생이 왜 저러나 싶었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어설픈 발음의 더듬더듬 대화가 가능한 우리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정말 즐거워 보였다는 것을.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은 일단 해보면서 어떤 상황에서든 즐겁게 살아갈 그녀의 태도가 너무 부러웠다.


 지금도 나는 외부 환경에서 오는 모든 요소를 불안하게 받아들이는 예민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하고 싶은 일에 용기도 못 내는 쭈뼛은 아닌 게 ‘일단 해보자’는 실천 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었을 것 같았던 홈트도 무려 세 번이나 하고 (근 한 달 동안..) 유튜브 계정도 만들어 영상을 두 개나 올렸다. (약 5분짜리 별 것 없는 내용..) 출판사 서평단으로도 뽑혀 책 포스팅도 하고 그 덕에 개인적인 이야깃거리도 많이 메모해 놓았다. 가끔은 평일 서울로 출판 강연회도 가고 (다음날 커피 세 컵 드링킹..) 어려워 보이는 직무도 천천히 해본다. 이 모든 건 완벽하게 해 보려는 생각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일단 몸을 먼저 움직여 발을 담가본 덕분이다.


 집에 오자마자 가방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는다. 재빨리 유튜브 영상을 켜서 스트레칭을 시작하면 오늘 홈트 성공. 정말 귀찮지만 포스팅을 하나라도 더 해 놓으면 나중에 서평단에 응시할 기회라도 생긴다. 몇 시까지 해야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지금 시작하자고 엉덩이를 뗀다. 뭐라도 해놓는 게 모든 일의 시작이자 끝이다.


숲을 볼 때가 있고, 나무를 볼 때가 있고, 땅 밑을 볼 때가 있는 법



 현재 내가 어느 시기를 지나고 있느냐에 따라 숲 전체를 바라봐야 할 때가 있고, 나무를 보는 시기가 있고, 땅 밑의 발끝을 보며 그저 묵묵히 걸어야 할 때가 있다. 지금 나는 잡념이 생각을 삼키지 못하게 땅 위에 걷고 있는 두 발이 성실히 움직이고 있는지 볼 때다. 가끔 앞을 바라보며 방향을 감지할 뿐, 약간 숨찬 리듬을 끌어안으며 출근을 하고 살림을 살고 지루한 일상을 견딘다.


 그냥 해 보는 것들의 무게가 묵직해지면 나의 시시한 도전도 많아진다. 이런 시도가 많아질수록 실패와 성공의 횟수도 늘겠지만 뭐 사람 인생이라는 게 결과로 즐거운 건 아니니까. 다들 말은 안 해도 실패한 과정이 더 즐겁고 재밌던 날도 있는 거 아닌가?


 오늘도 이불을 빨아 곱게 널고 냉장고 정리와 자질구레한 청소로 하루를 보낸 뒤 좋아하는 편의점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넷플렉스로 영화 한 편을 때렸다. 잠들 때까지 재밌는 예능을 보면서 소파에서 뒹굴거리고 싶었지만 꾸역꾸역 엉덩이를 들이 밀고 이렇게 브런치에 놀러 와 있는 건 삶이 내 멱살을 잡아끌고 가는 느낌이 좋아서다. 가끔 내 인생, 되는대로 살고 싶은 마음도 드는 닐. 말도 안 되는 글을 쓰고, 어설프게 만든 음식을 만들어 먹고, 따뜻한 족욕을 하는 이런 것들이 결국 진짜고 구체적이어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고 싶을 날 일으키는 힘이 된다. 마치 영혼은 없지만 익숙한 몸짓으로 나를 살려내는 습관처럼.


기도는 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다만 기도하는 자의 마음을 바꿀 뿐이다. (키에르 케고르)


 요즘 나의 기도는 “일단 해보겠습니다.”이다. 귀찮음과 두려움, 불안과 초조가 뒤엉키는 생활에서 일단 해보겠다는 나의 다짐이고 약속을 웅얼거린다. 어찌 보면 결국 신은 내 기도를 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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