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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Dec 01. 2019

에세이 말고 소설을 읽는 계절

문장으로 버티기

인생을 살아가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


 쉽게 손이 가는 책을 따지면 에세이와 소설이 거의 차지한다. 이중에서도 에세이 비율이   높은 이유는 직선으로 오가는 대화에 공감과 위로가 크기 때문인데 이상하게도 추운 늦가을과 겨울, 12월이 다가오면 뜨끈한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은유와 비유, 미사여구 화려한 소설에 빠지고 싶다.


 나의 변화나 행동을 자아내는 힘은 확실히 '소설' 굵다. 마음이 불안하고 심적으로 자잘하게 흔들릴 때마다 거의 병적으로 모든 문장을 읽고 지금 내게 필요한 약을 처방받듯 글을 찾아 헤매는데 마치 아침에 커피  잔을 수혈하지 못하면  하루를 망치듯, 문장 없는 내일을 살아내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내가 처한 상황에서 다른 세계로 훌쩍 떠나는 간접 경험의 통로다.


 고루한 교수들에게 독촉하듯 원고를 받아내고, 그걸 편집해  권의 책을 매달 찍어내던  에디터 시절, 떠날 용기가 없어서 퇴사하지 못했다. 아니, 용기라기 보단 어떤 구실이나 핑계가 빈약해 겨우 겨우 출퇴근을 반복하던 그때, 연수는 나를 런던으로 이끌었다. 가족과 친구에게 매일 불평과 푸념을 늘어놓기 미안해 속으로만 극적 변화를 꿈꾸던 시절, <쿨하게 한걸음> 소설의 주인공 서른세  연수는 스물여섯 나에게 이상한 공기를 불어넣었다. '삼십  인생도 별다른  없어. 간혹 우울하고 불안하지만  봉싯한 하루도 기대하는 날이 반복되는  인생이야라는  권의 서사가, 비행기표를  끊게 했다.

카톡 상태 메시지에 '연수  고마워요.'라고 남긴  나는 떠났고, 돌아와  책을 다시 펼쳤다. 곁에 있지 않는 종이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지만  삶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  고마운 친구였고, 종종 무기력이 덮칠  필요한 친구였다.   없는 불안의 깊이를 더듬더듬 걷노라면 종이  선명하게 쓰인 소설의 문장이 작은 가로등이 되기도 해서 그걸 의지 삼아 앞으로 걸었다.


  위에 적은 글은 천명관 소설가의 <고래> 일부분으로 마치 광고 카피처럼 책을 관통하는 문장이다.  소설은 누가 내게 책을 추천해 달라고  때마다  권하는  중의 하나여서 마음속 1번과 2번을 다툰다.(경쟁 상대의 책은 <김약국의 딸들>.) DNA 장착된 기본 색깔이 회색과 가까운 나는 마냥 밝고 환한 서사보다 찌질하고 추잡한 인간들이 모여 만든 이야기에  흥미가 당긴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가까이하지 않을 인물이 득실대고 툭툭 내뱉는 그들이 하는 말이 의아하겠지만  안에서만큼은 다르다. 타인의 고통과 욕망을 학습하고  세계에 스며들게 내버려 둔다. 그런 의미에서  <고래> 인간에 대한 환상 없이 그들의 욕심과 집념으로 많은 문장을 탄생시켰고, 그게 무의미와 의미를 왔다 갔다 하면서  가슴에 뭔가를 남겼다. 그것이 타인을 향한 의심이든, 믿음이든 인간의 본성을 확인한 계기다.


 소설과 에세이의 차이점은, 에세이가 공감을 무기로 너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는다면 소설은 너의 삶은  모르겠고, 나는 그냥 이렇게 살고 있다며 건조한 표정을 띤다. 흔히 소설을 작가의 상상 무대로 여기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철저히 현실임을 깨닫는 이유는 소설의 뒷면,  우리가 사는 현실이 이야기의 어떤 맥락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  언어를 결코 타인의 이야기라 선을 긋지 못하고, 끊임없이  서사에 빗대 보면서 인간을 이해하고 가까스로 인정한다. 요컨대 이별  카페에서 혼자 훌쩍이며 읽던 <참을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은 십여 개의 밑줄과 테레사와 토마스의 운명은 나에게 상처 줬던 그놈을 여러 의미로 살펴보며 쪼잔하게나마 이해해   있는 근거가 됐다.


 소설에선 정말 굉장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주변인으로서 그들의 이야기를 차례로 듣고 나면  누구 하나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없게 되는데, ' 그럴 수도 있겠다' 얕은 수긍 위에서 나의 한계를 확인하며 타인을 조금씩 인정하고 넓혀가는 과정이 생긴다. 폭발적인 인류애는 아니어도 적게나마  주변 사람의 이상한 성격을 이해해  차분한 시선이 더해진다. 이런 간접 경험이 반복되면  괴롭히는 또라이 상사, 깍쟁이 대리, 까칠한 동기의 숨겨진 서사를 상상하고 ‘,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덮어버릴 때도 있다.


 소설보다  소설 같은 이야기에 살고 있는 지금,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변주된 인생을 따라 삶이 숨겨 놓은 단서를 모으고 그걸 해석하면 평균치의  삶이 기적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별처럼 반짝이는 단어와 중립적으로 보였던 문장이 소설 안에 흐르고 결국  말이 되는 순간, 지금이 버틸만해진다.  뭐랄까, 정신 차리고 삶의 기본을 다시 챙기면서 생활 속을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  이야기의  페이지를 향해 가는 느낌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삶은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란   몸을 관통하는 멋진 말이고 소설에서 건져 올린 내가 지향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다. 매일 6:30분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출근 시간을 찍어 업무를 시작하는 날들이, 먼지를 닦아도 또다시 내려앉는 먼지를 닦는 일처럼 느껴져도 삶은 원래 그런 라고 이해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소설은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게도 하지만 인생의 모순과 의아함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되는  같다. 안갯속을 헤매는 등장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고 결국 그들이 도착한 곳에 이르면 그들뿐 아니라 나도 뭔가가 변해 있다. 그동안 굳어 있던 고정관념이 떨어져 나간다든지, 혹은 다른 선입견이 입혀졌을 수도 있고, 어제는 친절했지만 오늘은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분명한  우리 인생은 수많은 은유로 점철되어 있고, 그걸 감지할  있는 감각은 꾸준히 소설을 읽는 일이다. 은유를 제대로 읽을  알면 현실 감각도 생생해진다.   모순이야 말로 소설과 인생을 이끄는 은연한 힘이라는  확신한다.  사실은 복잡한 인생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있는 작은 단서다.


 문장 위에 여러 문장을 겹치고 빼고 더하는 과정을  성실하고 진지하게 밟는 소설  사람들을 사랑한다. 결국 자기만의 방법으로 희로애락을 겪고 운명을 만드는 그들이, 오늘도 내겐 인생의 선생님들이다.


 오늘은 <고슴도치의 우아함>의 세계 속으로 가보려 한다. 그 세계에서는 또 누구의 삶을 읽어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나는 또 얼마큼 인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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