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두어 번, 조용하고 고요하게 지내고 싶은 날이 있다. 바로 생일과 성탄절.
생일은 20대 후반부터 홀로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보내다 저녁에 부모님과 식사가 전부. 카톡으로 연락 오는 횟수도 점점 줄고 으레 다들 잘 지내고 있으려니 생각하는 마음을 알아서 별로 섭섭하지도 않다.
성탄절도 내게는 어릴 때부터 화려한 날보단 소박한 25일에 가까웠다. 아빠가 휴일에 더 바쁜 일을 하셔서 집에 엄마랑 둘이 있는 날이 많아 TV로 형형색색 즐거운 크리스마스의 거리를 구경하곤 했다. 커서부터는 이날마저도 홀로 조용히 카페에 가서 글을 쓰거나 내년 소망과 계획을 세워 보며 차분한 형식을 갖춰 지내왔다.
그래도 유독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가 있다면 대학교 마지막 학년, 진로를 정하지 못한 채 화장품 로드샵에서 혼자 일하던 날이었다. 그 해에는 이브 날, 싸락 눈이 휘이 날려 제법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나고 매장 안에서 쉼 없이 캐럴이 흘러나와 더없이 따뜻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기분. 연인이 함께 마스크팩을 고르는 일도, 남자 친구가 여자 친구에게 매니큐어 색을 골라주는 일도 참 이뻐 보였지만 그걸 계산하는 나의 손은 외로웠던 기억이 난다. 지금처럼 휴일 수당을 더 쳐주는 것도 아니어서 돈을 더 번다는 대체할 기쁨도 없이 어제를 오늘처럼, 오늘을 내일처럼 숙연하게 보냈던 스물세 살의 크리스마스. 참 이상하다. 분명 반짝이고 행복하지 않은 날이었음에도 그때를 회상하면 고요한 세계가 흐른다. 눈으로 더러워진 바닥을 닦고 진열된 샘플 화장품을 정리하고 간간히 창문으로 내리는 눈과 하늘을 보면서 이런 성탄절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다들 행복하기만 날이 어디 있을까. 누구는 버려진 쓰레기를 다름없이 치우고 또 다른 누군가는 편의점 취객을 상대하는 이브의 밤. 각자 서 있는 상황에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하루.
작년부터 성탄 전날에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간다. 마음속 신을 마주하고 고요히 말씀을 나눌 그 시간과 들뜬 마음을 가라 앉히고 무탈했던 한 해의 감사함을 인사하는 진심이 좋아 12월이 되면서부터 이 날을 무척 기다려 왔다.
성당에는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도, 부부가 함께 온 커플도, 홀로 찾은 이도 있다. 마리아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드리는 모두의 모습이 쓸쓸하면서도 진지하다.
[잊기 좋은 이름]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거라고 그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면서 거리마다 어떤 광기 같은 열기에 휩싸여 있던 해였는데, 크리스마 날 저는 이삿짐센터에서 이삿짐 나르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정신없이 짐을 나르다가 어느 순간 포근해 보이는 눈송이가 창틀을 넘어서 텅 빈 방 안으로 천천히 하나둘씩 조용히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정말 그 순간 정지 버튼을 누른 듯이 분주하던 그 모든 게 정지하고 눈송이만 하나둘씩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는 거예요. 그저 그 순간 입을 벌린 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없었습니다.
형형색색의 트리와 캐럴 속, 무채색 필름을 덮은 것 같은 조용한 크리스마스이브날이다. 출근을 했고, 서류를 검토하고 팩스를 보냈던 많은 날의 하루. 하지만 이제 퇴근을 했으니 나만의 크리스마스이브가 시작될 시간이다. 묵힌 감정을 정리하고 마음을 순화할 것이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송이처럼 조용히 그리고 고요하게 나만의 아름다운 성탄 의식을 치러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