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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Jan 29. 2020

내 부모가 가난해지는 걸 볼 때

돈 없는 부모님이 부끄러웠다.

 내가 나이 먹고 있다는 걸 느낀다면 첫 번째는 이력서를 수정할 때, 그리고 부모님을 뵐 때인 것 같다.


 젊고 건강했던 부모님의 등이 제법 작아지고 손에 생긴 잔주름을 발견할 때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훅 지났을까 싶다. 무심한 딸이 나만 생각하고 사는 동안 엄마와 아빠는 차곡차곡 나이를 먹고 있었나 보다. 아저씨와 아줌마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가는 지금, 자꾸만 돈을 아끼는 두 분의 모습에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기름 난방 아낀다고 온도도 올리지 않고 옷만 껴 입고 있는 엄마, 아빠가 낯설었다. 함께 살 때는 겨울에 반팔도 입고 지냈으면서. 왜 몸을 가장 잘 관리해야 할 나이에 청승인가 싶었지만 그 속을 왜 모르랴.


 아빠는 육십 세에 은퇴하시고 아파트를 팔아 시골로 와 집을 지었다. 나름 관리비도 아끼고 노후 자금을 마련한다고 노력하신 일인데 의외로 집을 짓는 건 깨진 독에 물 붓듯 돈이 줄줄 새 나가는 일이었고, 본인들이 모두 신경 써야 할 집은 관리비를 훌쩍 넘고도 남았다. 현재 자산을 짐작하긴 어려워 뭐라 말은 못 드렸지만 이전과 다른 몇몇의 생활만 봐도 돈을 아끼고 있는 두 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돈만 많으면 난방비 걱정 없이 기름보일러 빵빵 트시라고 겨울마다 두둑이 용돈 좀 드리고 싶어도 내 코가 석자인지라 애써 모른 척했었다.


 오랜만에 엄마 밥을 먹어 참 좋았던 명절이었는데, 퇴직하고 늘 집에 있는 아빠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돈도 벌고 재미도 있다며 생전 바깥일도 안 해본 엄마가 요양사 자격증을 신나게 준비하는 모습과 달리 아빠는 늘 집에 계신다. 애지중지 키우는 강아지를 돌보고 엄마 대신 밥을 차리는 아빠. 젊었을 때는 아주 멋쟁이에 어디 가서 노래도 곧잘 부르며 잘 놀던 아빠가 집에서 혼자가 됐다.


“아빠도 엄마처럼 뭐 좀 배워보지 그래? 늙을수록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대. 밖에 나가서 사람도 만나야 더 활기차지고 뭐든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


“아니야. 그런데 나가면 다 돈인데 뭐..”


“니 아빠 맨날 집에 저렇게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어. 혼자 있으면 별 생각 다 드는데.. 신경을 너무 많이 쓰는지 위장약도 먹고 있잖아.”



댕~~ 하고 머리가 울렸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돈 때문이었다니. 주민센터에서  취미 하나 배우는 게 그렇게 큰돈이 필요하던가?

나한텐 얼마든지 용돈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던 든든한 아빠의 표정이 한없이 쪼그라든 모습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물심양면으로 더없이 풍족히 채워 주셨던 부모님이다. 부자까지는 아니어도 삼시세끼 꼬박 챙겨 먹이고 철마다 옷 갈아 입히며 읽고 싶었던 책과 갖고 싶었던 문구용품은 눈치 보지 않고 살 수 있었던 덕분에 지금까지 책을 좋아하는 어른으로 클 수 있었다. 작든 크든 그들이 만든 안락한 세계에서 무한한 사랑만 먹고 자라 이제는 내가 되돌려드려야 할 시간임에도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다. 다른 친구들은 시댁의 노후가 걱정이어서 불만이라던데 나는 반대로 우리 부모님의 노후가 걱정되어 자꾸만 주택연금을 알아보고 그동안 개인연금 하나 들어 놓지 않은 두 분의 재테크를 속상해한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괜히 나의 부족함을 부모님 탓으로 돌리는 거다.


 없는 돈에 푸짐한 고기와 반찬 준비해 놓고 사위, 딸 잘 먹으니 흡족해하시는 엄마, 아빠. 우리가 가져간 거라곤 나 대신 딸 역할 중인 강아지 간식 사간 거밖에 없는데..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있는 일이겠거니 싶어 밤늦도록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도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필요한 몇 가지 물품을 휴대폰으로 주문해 드렸다.


 여러 이야기 끝에 넌지시 돈이 부족하단 말씀을 듣고, 딸자식한테 부담 안 주려 그동안 별말씀 없었다는 걸 알고 난 후부터 갑자기 철이 든 느낌이다. 사회에선 그토록 어른 대접받으려 안간힘을 쓰더니, 부모님 앞에선 정말 속없고 철없는 애였구나.


돈 없는 부모님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그런데 내 앞에서 돈이 없단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는 부모님이 솔직히 창피하고 부끄러웠던 것도 같다. 이제 내가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단 사실을 피부로 느껴다. 집에 큰일이 있거나, 혹여 누가 아프시기라도 하면 그들이 의논하고 의지할 곳은 나밖에 없다는 게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형제자매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부모님에게 나는 ‘선물’ 같은 자식이었지만 부모님은 내게 ‘짊어져야 할 몫’이 되어 버린 기분이다. 아마 내가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는 딸이라서 더 그런 것 같다.


 머릿속으로 통장의 액수를 세어 본다. 엄마, 아빠한테 50만 원씩 용돈으로 드릴 수 있을까? 매달 드리는 것도 아닌데 겨우 100만 원 남짓에 자꾸만 브레이크가 걸렸다. 나중에 여행 가려고 꿍쳐 놓은 비상금인데.. 이것만 꼭 쥐고 회사 다니는 힘을 얻었는데.. 그래도 드릴 수 있는 게 어디냐 마음을 잡고 바로 아빠 통장에 돈을 넣었다. 이 돈이라도 드릴 수 있어서 어찌나 다행이던지.


 부모가 가난해지는 걸 보는 자식의 마음은 한없이 쪼그라들고 납작해질 수밖에 없었다. 젊었을 때 돈이 없는 것과 늙어서 돈이 없는 건 천지차이일 텐데. 엄마와 아빠가 괜한 걱정과 불안으로 마음만 쓰실까 봐 온종일 신경이 곤두섰다.


"아빠, 용돈 100만 원 보냈으니까 엄마랑 50만 원씩 각. 자. 따.로. 쓰세요."


 일하기 싫으면 언제든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날들이 있었다. 엄마와 아빠랑 같이 살 적이다. 당장 내가 벌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었던 우리들. 그 덕은 아빠의 노동 값과 엄마의 봉사 값에서 나왔다. 우리에게 돈이 얼마가 있는지, 또 얼마나 쓰는지 상관없이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달렸고 부모님은 뒤를 지켜 주셨다.


 30년간 먹고 입힌 보람 없이 딸년은 결혼하고 지 가정을 꾸렸다. 아낀다고 친정의 반찬을 털러 오고 또 뭐 가져갈 것이 없나 기웃거렸던 신혼. 엄마 눈엔 그저 귀여워 보였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나쁜 딸이었다. 샘플만 써서 뚜껑도 잘 안 닫히는 엄마의 화장품은 보지도 못하고 나의 쇼핑 리스트만 늘려 갔다. 엄마 손에 물 묻힐 생각만 하지 말고 그 자글자글 주름 진 손에 돈이라도 좀 쥐어드릴걸. 이제 와서 별 별게 다 후회가 된다.


 어디 친정 부모님뿐일까. 엄마와 아빠를 챙기니 자연스레 시부모님도 눈에 밟힌다. 예쁜 며느리라고 늘 용돈도 챙겨 주시고 맛있는 것도 꼭 사주셨는데.. 당연하다듯이 받아먹기만 하고 며느리로서 살뜰히 챙길 생각을 못했다.


 이제야 와서 자식의 도리가 뭔지 고민스럽다. 성격이나 살가우면 자주 연락하고 찾아뵙겠는데 무뚝뚝하다 못해 무심하기까지 하니 이건 패스. 그렇다면 돈이나 많이 벌어 드시고 싶은 것들 마구 사드릴까 싶어도 능력이 딸려 패스.


나는 도대체 뭐하는 자식인 걸까.


가끔 길을 가다 폐지를 줍는 할머니들을 보면 부모님 모습이 겹친다. 저분들도 자식이 있고 가정이 있을 텐데 나름의 사정 때문에 위험한 길을 나서시는 거겠지 싶은 마음과 혹여 나중에 우리 부모님의 모습은 아니겠지 싶은 걱정이다. 물론 내가 옆에 있는 한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니 지금부터라도 착실히 돈을 모으겠다고 뒤늦게 다짐한다. 가까이 있어서 무심했고 부모님이라고 기대기만 했다. 내 나이 먹는 것만 알고 그들이 늙어가는 건 신경도 안 썼다.


 마치 나는 혼자 커온 것처럼 행동하고 부모님의 노후가 나의 몫이라 여기며 부담스러워 한 요 며칠. 아직도 엄마, 아빠가 점점 가난해지고 있는 게 슬프면서도 화가 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몇 가지밖에 없다. 필요한 물건 온라인으로 주문해 드리고, 안부 전화 빼먹지 말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부풀려 놓는 것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나보다 훨씬 효녀 노릇을 톡톡히 한다는 걸 잊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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