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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May 31. 2020

백조의 품위는 버둥치는 발에서

품위를 말할 때 있어야 할 물건




나는 여성의 스타일을 가늠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곳이 손목이다. 시계를 찬 여성을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설레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든다.


본인에 대한 확신이 분명히 차 있는 사람같다.



영화 사랑의 모양 중
영화 인턴 중
영화 그 후 중



동서양을 막론하고 얇은 손목 위에 무심하게 착 올린 시계는 사람을 지적으로 보이게 하고 그 자리에 서 있도록 하는 힘이 있다. 성격이 모나든 둥글든, 가난하든 아니든, 심지어 술자리의 약간 풀어진 상황에서도 자기가 정해 놓은 선만은 결코 넘지 않겠다는 철저함이 느껴진다.


액세서리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유독 시계에 눈이 가는 건 반지와 목걸이 같은 데일리성이 강한 소재보다 벗고 차는 의식적인 습관이 길들여져야 하는 시계의 속성에서 비롯된다. 이는 신경을 써서 자신을 가꿀 줄 안다는 것을 뜻하고, 그래서 스스로 품위를 챙기는 것 같은. 그런 느낌과 통하니까.


개인적으로 가죽 스트랩에 스퀘어 프레임을 가장 좋아하고 그 다음 가죽 스트랩과 라운드 프레임의 합이다. 이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막연히 느끼기에 전자는 조금 더 이성적인, 후자는 조금 더 관대한 느낌이 든다.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뭐라 정의하긴 어려워도 가죽 스트랩이 주는 어떤 고집이 있는데 그건 클래식과도 연결된다.



해마다 나이를 차곡 차곡 먹다 보면 이런 저런 생각이 드는데 유독 마음에 자주 새기는 건 ‘태도를 품위있게’ 만들고 싶다는 거다. 꼰대와 라떼를 비유하여 옛날 사람과 젊은 사람을 갈라 놓는 작금의 시대에서 어떻게 하면 품위있게 나이를 먹을 수 있을지 고민이라면 고민인 것이다.


20대 후배에게 쿨하고 산뜻한 조언을  해주고 싶지만 그래도 이왕 해주고 싶은 말은 내가 겪었던 경험에 의한 효율적이고 알짜배기 같은 이야기여서 나보다 잘 되고, 또 나처럼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란 의미로 ‘기본’의 중요성을 운운한다. 물론 이게 정말 나는 진지하게 말하는거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또 그 말이야?’ 하고 지겨워할 수 있겠지. 그래서 이게 꼰대처럼 비춰지지 않으려면 품위, 이것이 받쳐줘야 한다는 거다.


요즘 사람들은 어떤 일을 진지하게 대하기 보단 유쾌하게 넘어갈 수 있는 능력이 큰 반면에 노력과 성실로 승부 보려는 사람은 쿨하지 못한 쫌생이 취급을 하는 것도 같다. 되도 않는 콘텐츠로 수입을 버는 사람을 플랙스 하게 보지만 노량진에서 외로운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은 답답하게 보기도 하니까.


나도 그랬던 시절이 있다. 아무 노력 없이 시작한 일이 우연히 잘 되어서 마치 내 능력인 것처럼 우쭐거렸던 때가 있고, 반면 열심히 했어도 망한 것들이 큰 상처로 남게 하기 싫어 대충해서 이렇게 되어 버렸지 뭐야~하고 넘어갔던 때도 많다. 문제는 그렇게 살았더니 모든 일을 대충하고 피하려는 나약한 태도만 남겨졌다는거다.


그렇지만 여러 사람과 다양한 일을 겪어 볼수록, 어떤 일이든 진지하고 정성스럽게 해보는 게 요즘 말로 진정 플렉스이며, 그게 바로 ‘품위’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품위가 뭔지 잘 모르겠다. 너무 뜬금없고 먼 단어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싶지만 우아함의 상징인 백조를 상상했을 때 물 아래서 열나게 휘젓는 두 발이 그것 같다. 물 위에서는 우아해 보일지라도 아래서는 열나게 다리를 저어 고요를 지키는 것처럼 겉으로는 차분하고 주위에 동요하는 일 없이 내게 주어진 일을 열나게 하는 게 스스로 품위를 높이는 지점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알아주는 사람 없어도 밤낮으로 무료 어플을 개발하는 사람들, 봐주는 이 하나 없지만 새벽녁 거리를 고요히 청소로 깨우는 사람의 노동이야 말로 품위다.


멀리 갈것도 없이 회의 시간에 다들 핏대 높이며 싸우는 와중에도 혼자 곰곰히 본인의 업무 프로세스를 파악하고 될 것과 안 되는 것을 정확히 구분해 차분한 목소리로 들뜨지 않고 의견을 전달하는 팀장님을 보면 존경이 절로 나온다. 상대에게서 나오는 말 속의 격한 감정을 걷어내고 그 안의 팩트만 골라 들은 다음 감정 전달 없이 사실로만 이루어진 일의 말을 전달하는 리스펙. 다들 말은 안 해도 그의 등 뒤에서 나오는 어떤 고요한 아우라를 분명 느꼈을거고 그것은 차장님의 품위였다.




옆에서 누가 싸우거나 말거나,
나름의 질서와 순서로
자신의 할 일을 해나가는 사람.



진지하게 일을 해치우는
우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변화를 원했다. 크고 작은 실패를 더는 변명으로 덮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내 잘못이라고 말하며 실패 속 작은 기회들을 바로 잡고 싶었다. 그러려면 단호하게 결정할 내 의지가 필요했고 자신감을 장착해야 했다.


나는 그 염원을 손목시계에 담아 늘 차고 다녔다. 일단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되려면 가고자 하는 가치관을 정하고, 스타일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먼저 눈에 보이는 걸 변화시키면 내 마음도 바꿀 수 있으니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듯이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자꾸 눈에 띄면 행동을 바로 잡을 수 있겠다 싶었던 거다.


매일 아침 옷을 갈아 입고 손목 시계를 찬다. 사각 프레임에 검정색 가죽끈의 클래식한 시계를 차면 내 모습이 마치 차분하고 이성적인 여성같다. 일단 그렇게 의식의 마법을 걸면 어떤 문제가 생겨도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진다.

이건 설거지를 할 때, 막 마른 수건을 갤 적에도 마찬가지다. 손목시계만 있으면 '나는 이 일을 진지하게 하고 있어. 그냥 대충 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하고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어쩌면 백조의 버둥치는 발이 나에겐 '손목시계'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앞으로 40대가 되고 50대가 되면 더더욱 갖고 싶어질 품위의 몸과 마음가짐을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키워 놓아야 할 것 같다.

품위도 기초체력과 같아서 미리 미리 노력해 놓지 않으면 갑자기 나중에 우아한 사람이 되기는 어려울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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