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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Jun 16. 2020

코로나 시대의 최적의 집

작은 마당이 있는 곳


[취우]

푸른 나뭇잎에 매달린 빗방울이란 뜻이란다.


아마 마당 있는 집에 살지 않았다면 이런 단어는 평생 모르고 살았을지 모르겠다. 아니 단어는 외웠을지라도  눈으로 보고 만져보는 경험은 영원히 없었겠지.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집은 아파트이고, 결혼 후 독립의 이사까지 총 네 번 동안 거주한 곳도 촘촘히 다른 동으로 둘러 싸인 아파트였다.


부모님의 전원주택 생활 선언은 정말 의외였다. 그것도 직접 집을 짓는다니. 그냥 매물로 나와 있는 여러 주택 중 하나를 골라 전세로 살아봐도 됐을 텐데 아빠는 은퇴와 동시에 신도시의 삶을 접고 시골로 내려가셨다. 집을 짓는 일은 예상했던 비용보다 훨씬 더 들어 기대보단 걱정으로 바뀌었지만 이제 나름 5년 차 주택살이를 해 보니 역시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이 훨씬 많다.


모든 것이 완벽하길 바라는 마음만 버리면 마당 있는 집의 삶은 선물 그 자체다. 모기와 파리는 같은 세입자고, 벌레도 가끔 들르는 단골고객. 가끔 고라니가 마당에 똥을 누고 가도 허허 그러려니.. 한밤중 길을 잘못 든 아줌마가 대문을 부시고 가도 허허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인드만 있으면 부족할 게 전혀 없는 이곳은 무릉도원이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이곳의 매력은 깊어진다. 밥 먹고 현관문을 나서면 바로 보이는 것들이 꽃과 나무, 풀, 하늘, 산, 흙. 자연 뭉텅이다. 지구를 100억 분의 1로 잘라 놓은 케이크 같은 풍경을 마치 내 것처럼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건  워런 버핏이 정말 하나도 부럽지 않은 일이다. 마스크를 벗고 풀의 숨을 들이마시는 곳.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촉촉이 젖은 잔디밭을 걷는 기쁨은 그 어떤 명상과 비교할 길이 없고 여러 나뭇잎에 닿는 빗소리는 유명 ASMR 부럽지 않다.


자연은 제 갈길을 간다는 위로


고요하고 무심한 풍경 속에 나만 덩그러니 있는 기분.

 

차분하게 내리는 비는 나와 세상을 가로막는 커튼이다. 이 안에선 그동안 욕심에 못 이겨 스스로 못살게 군 일들이 어루만져지는 듯하다.  


어떤 판단이나 주춤 없이 자연은 제 할 일을 한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지고, 손보지 못한 잡초는 그대로 몸을 키운다. 내 상황이 어떻든 주변에 있는 나무와 풀, 하늘과 구름은 늘 그곳에 있고 그 지점이 어떤 위로를 주기도 하는데 저녁 먹기 전, 잠시 마당에 나와 저수지 너머의 해가 주황, 빨강, 분홍, 그리고 보라색까지 뒤덮여 신비하고도 묘한 하늘로 물들이면  괜한 서러움이 일어나면서 마음이 울컥한다. 내가 슬프든 말든 지는 해는 제 갈 길을 가고 나는 그걸 멍하니 보고 있다. 그럼 이유 없는 어떤 나의 슬픔이 추슬러지고 차분하게 감정이 정리된다.


마당을 찬찬히 걸어 본다. 흑장미는 한쪽 구석에 도도하게 피어 있고 쑥스럼 많은 딸기는 구석에서 조그맣게 몸을 웅크리고 있어 따 먹기도 미안하다. 매실은 이제 한창 몸을 부풀릴 성장의 시기를 견디고 복숭아나무도 부지런히 꽃을 피워낼 준비를 하고 있다. 각자 고유한 6월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작은 마당은 코로나와 상관없이 계절에 흐른다.



한 달 혹은 3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던 이 시기가 이젠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그렇게 가기 싫던 운동도 타의로 못 가니 너무 가고 싶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마스크를 깜빡하면 놀래서 집으로 다시 들어가는 생활이 정상인가 싶기도 하다. 회사-지하철-아파트를 몇 개월 동안 반복하면 저절로 부모님의 작은 마당이 너무도 그립다. 물론 마스크를 끼고 집 근처를 산책해도 좋지만 그곳은 어디까지나 공적인 공간일 뿐, 속옷 바람으로 나의 사적인 마당을 걷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한 뉴스에 따르면 이제까지는 발코니를 트고 고층 뷰를 중심으로 한 고층 주상복합이 인기가 많았지만 코로나 19 이후에는 베란다가 있고 창문을 활짝 열어 바람이 잘 들어오는, 자연을 끌어 들일 수 있는 주택을 필요로 할 것이라 한다.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개인의 공간이 보호되고 바깥바람을 쉽게 쐴 수 있는 주택을 선호할 거란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부모님의 마당 있는 집은, 지금 이 시대에 부합하는 최적의 장소임이 틀림없다. 눈치 보지 않고 마스크를 벗을 수 있는 곳. 당신과 나의 호흡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곳. 여태껏 유지되던 일상이 박해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곳이니 말이다.


미루고 미뤘던 부모님과의 점심 식사를 처음으로 마당에 차렸다. 작은 화로에 숯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텃밭에서 갓 딴 싱싱한 상추와 로메인을 곁들인 만찬. 아마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외식을 했을 터인데 덕분인지 뭔지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집 앞마당에서 마스크를 벗고 크게 웃고 떠들며 함께 밥을 먹었다. 소박한 일상이었다.

 


이젠 이곳을 찾을 때마다 한껏 기쁘다. 아무도 없는 바깥에서 책을 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사회적 거리를 지키지 않고, 요즘 유행한다는 자연친화적인 카페를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 산과 꽃, 풀, 저수지가 한 뼘 거리에 모두 있다. 그리고 가족도 있고, 나의 사랑스러운 반려견도 옆에 누워 있다.

선선한 저녁 공기가 몸을 감싸면 고요와 차분함도 내 주변에 머무른다. 그럼 저절로 기도가 된다.

모든 것의 감사함. 내 존재의 미미함. 그럼에도 충분하다는 벅찬 감정.


내 글 솜씨가 부족해 책의 구절을 대신하여 마음을 표현해 본다.


집은 평화와 안온의 공간일  아니라 ‘자기 예배의 공간이기도  것이다. 먼지처럼 하찮아지는  존재가 문득 ‘삶의 경건함이라는 낯선 감각을 맞이하게 된다. (, 밥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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