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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Apr 20. 2021

난 공부는 못해도 숙제는 해갔어요

윤여정 님 인터뷰



올해 나이 74세, 데뷔 55년 차 배우 윤여정 님의 인터뷰가 담긴 책을 읽었다. 처음 이 책을 선택한 것도 윤여정 님의 ‘말’ 때문이었는데 아마 팬들이 기억하는 윤여정 님의 유명한  ‘말’은 ‘배우는 돈이 필요할 때 연기를 제일 잘한다’는 뉘앙스의 말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 말을 들은 순간 가슴에 탁 걸리는 게 느껴지면서 고개를 엄청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예술로서의 직업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직업으로서의 배우 개념이 신선하게 들렸고, 연륜 있는 여배우의 입에서 나온 솔직한 조언이었다.


어쨌든 윤여정 님의 저 말은 모두들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게 했는데 그렇다 해도 급전이 필요해 섹스신과 노출신이 필요한 영화에 기꺼이 참여했다는 윤여정 님에게 배우라는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 책, 자기인생의 철학자들 중-


Q. 김기영 감독이 그 시절에 “내 말을 알아듣는 이가 미스 윤밖에 없다”라고 할 정도로 영리한 여배우로 인정받으셨잖아요.


A. 미모도 재능도 없었지만 감독들이 디렉팅을 해주면 그걸 최선을 다해 따라갔어요. ‘도구로서 모든 걸 다 하리라’하는 그런 자세가 있었지요. 나는 창의적인 배우도 못 되고, 오히려 노예근성 같은 게 있었나 봐.


Q. “최고의 연기는 돈 필요할 때 나온다”는 명언이 그때 나왔지요?


하하하. 그랬어요. 난 실용주의자였어. 마침 집수리를 해야 했거든.


Q. 산전수전 다 겪고 유머 감각이 풍부해도 긴장하실 때가 있습니까?


A. 일할 때는 늘 긴장해요. 영원히 긴장하려고. 배우가 너무 편하게 하면 그것도 이상해요. 연기를 잘해서 그냥 노는 것처럼 보이면 그게 농익은 연기인가? 난 아닌 것 같아. 묘한 경계선이 있는데 어떤 식으로든 최선이 보였으면 좋겠어.



위 세 가지 질문에서 한 이야기만 들어도 윤여정 배우가 어떻게 일흔까지 현역으로 일하고 또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녀의 타고난 장점은 철저하다 못해 서늘하리만큼 정확한 자기 객관화와 거기서 파생된 실용적인 성격, 그리고 이것들을 빛나게 할 노력이 있었다.


공부는 못 했어도 숙제는 꼬박꼬박 해갔다는 그녀의 말은 어떤 연기든 성실하고 고집스럽게 완벽히 카메라에 담았다는 자체로 증명이 된다. 비슷한 연배의 여배우들이 모성애 강한 엄마, 친근한 이모의 배역으로 얼굴을 비칠 때 배우 윤여정은 섹스를 거침없이 말하거나 자기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얼굴을 내밀었다. 비록 감독이 원해서 혹은 돈이 필요해서 그런 역할을 억지로 맡았다 하더라도 그녀는 연필을 꽉 쥐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공책에 숙제를 하듯 그 배역을 카메라에 또렷이 남겼던 것이다.



공부는 못했어도 숙제는 꼬박 하는 일에 관해 생각해 본다. 나도 공부엔 뜻이 없었지만 숙제는 잘해간 학생이었다. 그때만 해도 체벌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은 시대였기에 일기를 안 썼거나 책을 빠뜨리면 교실 앞으로 나가 손바닥을 맞는 게 당연했다. 그게 싫고 창피해서라도 숙제는 꼬박꼬박 했던 나였지만 아마 체벌이 없었어도 나는 의심 없이 숙제는 당연히 해야 하는 디폴트 값을 가진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숙제를 해오지 않는 친구들을 불량하게 봤고 뭔가 잘못된 일처럼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커서 보니 숙제를 잘했다고 모두 성공한 삶을 사는 게 아니듯, 숙제 좀 안 했다고 다 못 사는 삶도 아니었다.


숙제는 그런 것이었다. 잘한다고 해서 전교 1등이 되지 않고, 안 한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 대신 꾸준히 단련해야 할, 이를테면 지겨움, 견딤, 반복, 성실함 같은 노력이 필요한 영어단어, 한자, 수학공식 같은 걸 공책에 꾹꾹 담아 쓰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자체만으로 빛나고 반짝이는 '재능' '천재' '행운' 같은 단어에 건조하고 무딘 ‘성실하다’와 ‘열심히 하다’의 동사의 시간이 함께 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숙제를 하면서 알아왔다. 근의 공식을 수도 없이 공책에 썼지만 수학 성적은 늘 안 좋았으니까.


하지만 이 숙제하는 시간이 없었더라면 어른이 되어 불공정한 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큰 애를 먹었을 것 같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게 있는 걸 아니까 주어진 인생을 그저 살아내야만 하는 삶도 이해할 수 있게 된 일이다.


그래서 가끔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속상할 때 숙제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하기 싫지만 억지로 해야 하는 게 숙제처럼, 살고 싶지 않아도 그냥 살아내는 게 최선인 듯 시간을 보내잔 심산이다.



인생을 숙제하듯 살았다 고백한 그녀. 불안한 생계에서 비롯된 절실함과 타고난 부지런함이 없었더라면 솔직함은 무례함으로 유머는 불쾌함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스스로도 열심히 살아왔다는 말이 거짓처럼 들리지 않는 건 우리가 아직까지도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숙제의 짐을 버리고 여유 있게 작품을 고른다는 윤여정 님의 성실했던 시간을 짐작해 본다. 55년의 배우 인생을. 거기에 비하면 나는 겨우 36년. 일한 지는 10년도 안 되는 이 조무래기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래서 숙제하듯 하나하나 복습과 예습을 하며 한 권씩 공책을 채워야 할 것 같다.

잘 사는 걸 떠나 그저 살아내기 위해 열심히 하다 보면 윤여정 님처럼 기분 좋은 소식이 들리지 않겠는가.


어쩐지 성실한 사람에게 늘 자극을 받는 나.

한국 배우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윤여정 님의 행보를 응원합니다.


- 사진출처 네이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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