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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May 11. 2021

작가가 글만 쓰면 되지 명품시계가 왜 필요해?

까르띠에 탱크 솔로


 우울하고 매일이 무기력한 근래, 소소한 나의 기쁨은 손목시계를 차는 일이 되었다. 시계가 뭐 대수라고 그게 즐거운 일이기까지 하겠느냐만은 이건 다 눈물겨운 스토리가 숨어 있기 때문인데...



 이 시계로 말할 것 같으면 3년 동안 눈독을 들이다 정말 크으은 마음을 먹고 산 것이며, 한국에선 구하기 어려워 구매대행이라는 낯선 쇼핑 루트를 통해 무려 300만 원을 넘게 주고 산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름하야 ‘까르띠에 탱크 솔로 은장’


 처음 이걸 보고서는 내 분수에 까불지 말자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참아 왔다. 월급보다도 비싼 손목시계를 어떻게 사느냐. 말도 안 되지. 그냥 꿈의 시계로 두자고 말이다.


 이런 생각으로 3년 동안 꾹꾹 참고 또 참으며 괜히 가격을 문의하기도 하고, 백화점에 가서 금장 시계를 걸쳐보기도 했다. 만약 내가 책을 출판하게 된다면, 회사에 헌납하는 노동의 대가 대신 정말 나의 글로 순수하게 단 돈 몇십만 원이라도 번다면, 그 기념으로 사볼까 싶어 비장하게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그동안 시계 값만 몇 십만 원 더 오른 걸 보고 눈이 헤까닥 뒤집혀 사고야 만 구구절절 스토리이다.


물론 여기에 ‘까르띠에’라는 브랜드가 갖는 의미보다는 단지 ‘명품’이라는 단어에 무명 글쓴이로서의 자존심을 기대 보고도 싶었고, 또 시계 자체가 너무 예뻐서 이걸 손목에 걸고 우아하게 타이핑하는 모습을 꿈꿨단 걸 인정해야겠다. 단지 내가 만든 작가의 이미지에 300만 원을 쏟아부은 것이다.


-


책, 슬픔의 위안


한 사람의 삶을 가장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가장 감동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은 소지품이다. 물건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우리의 중요한 일부다. 나는 물건을 갖고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나는 까르띠에 시계를 갖고 있다.

고로 나는 작가로서 존재한다(?)


 비록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않는 날이 한 단어를 깊이 생각하는 날보다 훨씬 많다고 해도 시계를 찬 손목을 볼 때마다 ‘글’은 놓지 않는다. ‘아 오늘은 꼭 글을 쓰자’ 다짐을 하고 ‘내일은 꼭 쓰고 말리라’ 체념을 반복해도 이 모든 기쁨과 후회가 즐겁기만 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시계가 날 가장 정확하게 표현해준 물건이며 동시에 나를 가장 감동시키는 존재가 맞다.



 스스로 이미징 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꼭 돈이 많아서 비싼 옷과 신발로 꾸미는 것이 아닌 내게 맞는 색감, 채도를 가진 소지품으로 롤모델에 가깝게 가보는 건 내게 맞는 스타일을 가늠해 보는 일뿐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의지를 담은 삶의 메시지 같은 것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적인 분위기보다는 중성적인 분위기를 좋아하고, 맑은 물에 스포이트 한 방울을 떨어뜨려 보라색 잉크를 뿌리듯 여성적인 느낌이 나는 진주로 포인트를 내는 것도 좋아하는데 이것은 내가 닮고 싶은 작가에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겠다는 균형을 뜻한다.


 여기서 내가 특히 신경 쓰는 질감은 ‘중성’에 맞춰져 있다. 왠지 ‘작가’라는 단어는 젠더에 크게 얽매이지 않지만 여성작가에게만큼은 오히려 중성이 더 어울리고 묘하게 여성이란 매력을 더 부각하는 듯하다. 영화 <작은아씨들>에서 조가 입고 나오는 샤랄라 한 프릴 장식을 신중하게 덮는 조끼와 가느다란 손가락에 마를 날 없는 잉크의 조합처럼. 또는 밤새 글을 쓴 - 한쪽 손엔 담배 한 개비를, 다른 손엔 아침에 내린 진한 블랙커피잔을 든 작가처럼. 이때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와 동그란 검정 가죽의 손목시계가 더해진다면 내가 동경하는 글 쓰는 사람의 이미지가 진해진다.


 너무 여성스럽지 않게, 그러나 여성의 특별함은 놓치지 않는 여성작가의 매력.


 마치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화려하지 않지만 눈에 확 띄는 디자인 같은’ 말처럼 모순적이게 들려도 내가 정해놓은 선이 분명히 있는데 그 선의 경계는 대개 손목시계를 챙겼냐에 따라 달려 있다.

시계는 중성의 질감을 완벽히 완성시키는 그것이다.



영화 실비아 (출처 네이버)
영화 84번가의 연인 (출처 네이버)

(위의 영화 속 작가들은 내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

옷과 액세서리 모두 흠잡을 데가 없다.)

 



 알고 있다.  까르띠에 시계를 찬다고 해서 내가 뛰어난 글을  거란 사실도 기대도 없다는 것을. 어쭙잖은 나의 허영심이 만들어낸 허구의 상상일 뿐이라고 해도. 그렇지만 마음  구석엔 등을 구부리고 진중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여성작가가 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글을 고독하게 쓰고 있는 사람.  마음이  공허하고 어떨  치가 떨리게 외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용기를 가지고 묵묵하게  글자  글자를 밀어내는 작가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또한 그런 사람, 오직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 좋아하는 까르띠에 탱크 솔로를 손목에 차고  글과   사이를 오가고 있다.


 나의 글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없기에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물건에 담는 행위가 어설프고 유약하게 보인다. 외면보다는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  올곧고 바르다고, 그래서 아름다운 마음을 키워야 한다고 교육받았지만 어쩐지 형식에 마음을 담고 싶을 때도 있다.


 바르고 단정한 , 곧게  가르마에 엄격하고  부러지는 감정을 표현할  있는 것처럼 아무도 알지 않는 ‘무명작가 존재와 지금도 열심히 글을 쓰고 그들에게 나의 존경심을 보내는 마음으로 기꺼이 까르띠에 탱크 솔로를 차고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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