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에도 외로운 당신에게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로마> 이후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만났다.
영화 ‘소년시절의 너’이다. 이 영화의 주 배경은 학교폭력, 왕따, 소녀와 소년이고 단어만 봐도 로맨스와는 거리가 먼, 그러나 눈물이 스르륵 나는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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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있다. 엄마는 빚쟁이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신세인지라 집에서도 늘 혼자, 왕따였던 같은 반 친구가 학교에서 자살을 하니 그 화살이 본인에게 와버린 소녀다. 학교 안팎에서 괴롭힘과 폭력이 재생되는 세계를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베이징대 입학이다. 그렇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죽기 살기로 공부를 해야만 한다.
어느 날 길을 걸어가는데 누가 맞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맞고 있는 소년에게서 소녀의 모습이 보여 휴대전화로 신고를 하려는 찰나, 불량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렇게 그날 처음 알게 된 양아치 소년과 모범생 왕따 소녀는 서로의 무엇이 되었다.
도와달라 아무리 소리쳐도 아무도 듣지 않는 현실에서 소년은 소녀의 든든한 보호자임을 자처한다. 그래서 소년에게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로부터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소녀의 몇 걸음 뒤엔 늘 소년이 있다. 나란히 함께 걷지 않고 적절한 거리 뒤에, 혼자인 것 같던 서늘한 이 세상에 나를 지키는 그가 있다.
언젠가 밝은 대낮에
둘이 당당하게 걷고 싶어
영화를 보는 내내 조용히 눈물이 났다. 아마 ‘외로운’ 마음에서 비롯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모님과 선생님 심지어 경찰도 이 불안한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둘은 서로를 감싸고 보호한다. 소녀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뒤를 봐주고, 소년이 다른 데서 맞고 오면 소녀는 상처를 만져 준다. 그렇게 서로는 오직 이 세상에 둘만 있는 것처럼 보듬는다.
상대를 지키려고 철저히 상대를 부정하는 일이 생기는 클라이맥스 장면은 영화의 절정이다. 나는 그 씬이 뻔한 영화의 결말처럼 이어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역시 이 영화는 달랐다.(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할게요)
어떤 이유에 상관없이 세상에 홀로 던져진 기분을 느끼곤 한다. 혼자 망망대해 배에 남겨진 듯한, 혹은 엄청난 바람이 부는 어두운 숲에서 무서워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혼자 헤쳐 나가기엔 너무도 겁나는 세상에서 내 뒤를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믿음을 갖는 일. 그래서인지 영화 내내 소년이 뒤에 있는 소녀가 부러웠다.
나는 네가 있어 버틸 수 있고, 꿈꿀 수 있어
누군가 함께 하고 있다는 안정감. 혼자라고 생각했던 세상에 나를 알아봐 준 사람이 생겼다는 조심스러운 행복. 물론 어떤 사람은 신을 의지하거나 이런 감정을 아예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늘 혼자 남겨진 사람처럼 마음이 공허하고 무섭기까지 한 기분을 종종 마주친다. 그럴 때 뒤에서 나를 감싸안는 무엇이 있다면.. 아무리 나를 괴롭혀도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지옥 같고 외로운 순간순간들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소녀가 친구에게 실컷 괴롭힘을 당하고 소년의 집에 찾아왔을 때 화가 난 소년을 다독이고 열심히 공부하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과 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알고 공부로 승부하려는 이 믿음은 소녀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미래다.
우리의 삶이 시궁창이라도
누군가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어
소녀의 책에 쓰여 있는 위의 글에서 보듯 쓰레기 같은 현실에서도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볼 수 있는 그녀의 힘은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내가 바뀌지 않으면 내가 여기서 나갈 수 없다는 처절한 믿음 때문이다. 간혹 ‘처절함’은 온 세상의 에너지를 한 곳에 밀어 넣고 앞뒤 가릴 것 없이 일단 직진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작은 체구의 소녀는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에서 오직 공부로 승부를 보려는 방법을 선택했다.
우리는 자주 ‘이 상황 좀 멈춰달라’고 기도하지만 결국 바꿔야 할 건 나의 마음가짐이다. 상황이 바뀌길 바라지 말고 내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아마 소녀도 그런 마음이었을 테지. 엄마에게 기대긴 힘들고, 친구도, 보호해줄 어른도 없는 이곳에 오직 믿어야 할 것은 나, 공부를 잘해서 베이징대학에 입학해야 하는 나이다. 물론 그것 하나만으론 너무 외롭고 마음이 아픈 어린 소녀였지만 이젠 그런 그녀 뒤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 그 누구에서 느껴보지 못한 단단하고 안정적인 소년의 보살핌 아래에 소녀는 차근차근 꿈을 향해 갈 수 있었다.
어두운 곳에 산다고 꼭 어두운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왕따라고 늘 혼자여야 할 이유도 없고, 공부를 포기할 명분은 더더욱 없다. 누구든지 시궁창에서 별을 바라볼 수 있고 그 별을 따러 나갈 수도 있다.
바로 이 지점이 내 마음을 일렁이게 했던 것 같다. 나는 상황이 안 좋다는 핑계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았던가. 혼자서는 할 수 없다고, 아니 하고 싶지 않다는 말 뒤로 숨어 지냈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단단하고 강한 사람은 ‘자신’을 믿고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지키는 거였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제일 알 수 없는게 ‘나’라고 떠벌리며 다녔었다. 그리고는 외롭다고,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준다며 투덜댔으니 얼마나 이기적이고 나약한 인간었는지.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도 소녀처럼 하늘의 별을 찾아 노력해 보거나 혹은 소년처럼 좋아하는 사람을 든든하게 지킬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시궁창 속에 내 인생을 떨어뜨리지 말고 떨군 내 삶도 다시 보자는 마음으로. 소녀와 소년처럼 그렇게 말이다.
넌 세상을 지켜, 나는 너를 지킬게
넌 앞으로 가, 내가 반드시 너의 뒤에 있을게
소녀는 말했다.
“난 세상을 지키고 싶어”
그러자 소년도 말했다.
“넌 세상을 지켜, 난 너를 지킬게”
세상은 이들을 지켜주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소녀는 세상에 나가고 싶었고, 소년은 그런 소녀를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런 마음이 모여 이들 인생이 환해졌다면.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한낮에도 외로움을 느끼고 싶으신 분들께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