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말고 읽기
읽고 산책하고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플로린스 그린은 하고 싶은 걸 알아냈다. 결국 눌러앉게 살게 된 작은 마을에 서점을 여는 것.
<영화, 북샵>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발견하고 두 번이나 보면서 책 읽는 여성이 갖고 있는 특유의 힘이 뭘까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이 서점을 여는 것이라니.
그녀는 어떤 생각이었던 걸까.
그동안 글 쓰는 여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영화로 보아왔다. 하지만 글 말고 책 읽는 여성에게 포커스가 맞춰진 이번 영화는 왜 여성들이 책을 읽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궁금증이 생긴 이야기였다.
쓰는 일은 고독하다. 어쩔 수 없다. 반면 읽는 일은 함께 할 수 있으니 이웃과 교류도 가능하고 그중에서도 ‘서점’이 갖는 특유의 매력적인 공간은 더없이 여성과 어울리기도 한다. 그러나 좀 더 본질적으로 여성은 왜 부엌 구석에서, 세탁기 옆에서, 잼을 졸이다가도 책을 읽어야만 했을까.
그들이 원했던 것은 생존이었다.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숨 막히는 시스템 속에서 단지 작은 숨이라도 이어가는 것. 슈테판 볼만은 “여자들은 살기 위해 책을 읽으며 삶을 견디기 위해 즉 살아남기 위해 책을 읽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말한다.
책 <아무튼 서재>에서 슈테판 볼만은 여자들은 살기 위해 책을 읽었다고 한다.
생존이라. 어떤 느낌인지 감이 왔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과 숨 막히는 작은 사무실을 벗어나고 싶지만 물리적으로 떠날 수 없을 때에. 간단히 펼쳐 읽기만 하면 되는 마법의 순간을 찾은 것이다. 제자리에서 맴도는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낡아빠진 노동의 무게가 버거울 때면 기꺼이 여성들은 책을 집어 들었고 그 세계로 초대되었다.
책은 여러 면에서 아주 유용하다. 반숙 계란 프라이를 만드는 법과 5분 안에 옷 정리를 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금발의 학생이 되어 1950년대 뉴욕의 거리를 떠돌게도 한다. 소설, 에세이, 실용서, 만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종이를 넘기기만 하면 우리는 이 세계 저 세계를 넘어 다니며 고유한 나의 정서를 더욱 세심하게 다듬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책, 책이 가능케 한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책 읽는 여성의 그림이 보고 싶어 졌다. 서재에 있는 그림 에세이를 펼치고 인터넷에서 여러 그림을 검색했다. 유독 내가 이들의 모습에 매료된 까닭은 초연하고 단단해 보이는 표정 때문인데 공통적으로 그들은 어느 세기에 뭘 하는 사람이든지 간에 책에 눈과 코를 박고 순수하게 몰입된 얼굴에 우아함을 남겼다. 그런데 왜 남성들은(같은 여성 또한 마찬가지로) 책 읽는 여성은 위험하다고 했을까.
마릴린 먼로가 책을 읽고 있는 사진은 결코 연출이 아니었다고 한다. 워낙 배움의 갈망이 커서 늘 곁에 책을 가까이했지만 그녀의 심벌인 백치 이미지가 진짜의 그녀를 덮어 버렸고, 책 읽는 여성이 풍기는 까다롭고 주체적인 분위기를 대중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녀를 섹시 금발의 미녀로밖에 대하지 못했다.
아마도 책은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은 마릴린 먼로의 지적인 변화를 원하지 않았고 가십걸로 남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쉽게 말하면 내 아래에 위치시키고 가볍게 즐길거리로만 소비하고 싶은 여성을 원한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책을 읽고자 하는 여성은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기에, 평범하고 소박한 여성들이 자기의 목소리를 가질까 두려워 책 읽는 일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책을 읽는 주체적인 행위는 더 나은 사람으로 되기 위한 생존의 방법이며, ‘내가 나에게 전하는 최초의 교육이자 최후의 교육’이다.
(책, 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중)
이런 의미에서 책 읽는 여성은 여러모로 지적인 동시에 발전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더 나은 인간들이 모여 더 나은 세계를 만든다는 조건하에 책 읽기만큼 좋은 수단은 없다. 또한 독서로 나 자신을 스스로 교육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 일인지.
영상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 시대에 자의로 종이와 활자를 선택하는 책 읽기는 요즘 말로 힙하기까지 하다.
확실히 글 쓰는 여성과는 다른 결이 느껴진다. 읽기와 쓰기는 결국 이어지기도 하지만 ‘읽는 행위’는 자신의 본질에 훨씬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눈앞에 놓인 하얀 종이의 막막함 없이 우리는 기꺼이 타인이 마련한 세계를 머물다 돌아가고 나의 고민과 불안을 감내할 수 있는 이야기를 얻는다. 그래서 여성은 옛날부터 더운 방에서 다림질을 하다가도 오늘을 살아내기 위한 책을 읽었으며, 매일 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을 하면서 읽을 책을 껴넣어 하루를 보냈다. 책 읽기로 스스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소설 한 권을 읽고 스물다섯에 예상치도 못한 런던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아마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충동적으로 갈 수 없었을 거다. 그렇다면 타국에서 맛보았던 고독과 다른 종류의 외로움도 몰랐겠지. 그때 얻었던 수많은 감각과 관계들로 지금의 나는 더 괜찮은 사람으로 되어 가고 있으니 책 읽는 여성은 더 멀리 떠날 수 있는 배짱을 가져봐도 좋겠단 생각을 한다. 물론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를 견디는 사람도 충분히 아름답다.
결국 여성은 여러 환경과 감각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책을 읽고 변화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플로린스도 남편이 죽은 후 삶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책방을 열기로 결심했고, 책은 베개로나 쓴다고 말하는 어부가 사는 작은 마을에서 이런 행동이 가능했던 건 그동안 그녀가 읽은 책에서 얻은 말들이 팔 할을 차지했을 것이다.
내 손에 있는 작은 세계는 언제나 내편이고 머릿속이 남은 이야기는 용기가 되니까.
기꺼이 다른 세계를 탐험하여 나의 세계를 확장하고 조정하는 시도로 우리는 자꾸 책을 읽는다.
요 근래 일곱 살짜리 아들을 키우고 있는 친구와 종종 서로가 읽고 있는 책을 주고받는다. 나는 서유미 작가를 추천해 주었고 그녀는 어른이 읽어도 좋을 동화책을 알려주었다. 서로의 시시한 안부 말고도 책을 매개로 대화거리가 풍성해진 관계가 우리의 우정을 다양한 모양으로 빚고 있다. 어느 날인가 친구는 지유가 만들다 만 점토를 치우면서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를 읽고 있다며 카톡을 보냈다. 마침 나도 <우아한 연인>에 밑줄을 그으던 참이었고 좋았던 문장을 사진 찍어 보내며 둘 다 이해의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우린 또 서로 발 담근 세계를 공유했고 친구는 아이를 씻기러, 나는 밥을 차리러 잠시 손에서 책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