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쉬는 토요일이다. 주 6일 회사를 다니는 내게 놀토는 여느 직장인들이 갖는 기본적인 휴일이 아니라 늦잠을 못 자도 아쉽지 않은, 딩굴딩굴 이불 위에 굴러만 있어도, 그저 눈뜨고 숨만 쉬어도 좋은 그런 날이다.
무얼 할지 빽빽한 계획도 세워보지만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어디 가지도 못하니 설렁설렁 집안을 누비며 그동안 소홀했던 몇 가지를 해보기로 했다..... 가 역시 유튜브 알고리즘은 무섭다. 이것저것 몇 개 보니 8시에 일어나 금방 9시가 되었다.
일단 91.9 라디오 어플을 켜면 DJ 이현우 님이 꽤 좋은 팝송을 틀어주어 이 시간에는 주로 이 라디오를 켜고 부엌으로 움직인다. 오랜만에 남편도 소파에서 딩굴딩굴하고 있네. 원래는 아침 당번인데 오늘은 쉬려나?
비도 오고 그래서 왠지 수제비가 땡기는 토요일 아침. 밀가루 두 봉에 계락 하나 탁 넣어 조물조물 반죽을 내어 야심 차게 냉장고로 가져간다. 숙성되는 시간 동안 내가 좋아하는 진미채 무침과 고추장 멸치 볶음을 만들기 위해 레시피를 검색하고 ‘좋았어’를 외치며 오랜만에 요리를 해본다.
진미채를 물에 살짝 헹궈 마요네즈로 버무려 놓은 다음 고추장, 간장, 설탕, 올리고당을 섞어 양념장을 만들고 잘 버무려 참기름과 참깨로 마무리.
뒤이어 진미채를 만든 하나밖에 없는 프라이팬을 씻고 멸치를 볶아 이번에는 고추장, 간장, 마늘, 참치액, 설탕, 미림을 넣은 양념장에 함께 버무린다. 음 맛이 너무 쓰네. 올리고당을 두어 바퀴 더 두른 후 역시 음식의 마무리 참기름과 참깨를 탈탈 털어 마무리 짓는다.
이 두 가지면 미역국에 밥을 말거나, 카레에 밥을 비비거나, 그냥 김 하나와도 잘 어울리는 만능 반찬이 된다. 사실 이렇게 밑반찬 만들기를 서두른 건 며칠 전 통장의 잔고를 보고 배달음식을 줄여보겠다는 나의 조용한 다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실천이 이 진미채 무침과 멸치 볶음에 담겨 있다. 다음 주는 무조건 집. 밥이다.
어질러져 있던 양념통을 정리하고 스테인리스 볼, 수저, 프라이팬, 컵을 설거지하는데 남편이 이마트에 다녀오지 않겠냐고 청소기를 돌리면서 물었다. 그러다 비바람이 꽤 세차게 불어 그동안 벼렸던 베란다 청소를 하기 시작했는데, 1년에 한 번도 안 열어본 베란다 문을 열고 짧은 호수를 방충망과 창틀에 뿌렸더니 비바람을 탄 물들은 비인지 물인지 분간을 못하고 저 멀리 사라져 먼지까지 함께 가져갔다. 실로 정말 몇 년 만에 베란다를 청소하고 닦았고 뽀송뽀송한 바닥을 맨발로 문지르는 좋은 느낌을 느꼈다.
남편이 베란다에서 씨름하고 있을 때 설거지를 마친 나는 얼른 변기솔을 집어 들고 두 개의 화장실 변기를 청소했다. 다음 주엔 어머님 생신으로 집에 없을 예정이므로 시간이 날 때 얼른 화장실 청소를 해두어야 한다는 계획이 선다. 이젠 이 정도의 살림 감각은 재빠르게 캐치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주에 못할 바엔 이번 주에 한다. 다다음주엔 늦다. 특히 화장실 핑크 곰팡이는 우릴 봐주지 않는다는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얼추 집안 청소도 마쳤기에 그냥 누워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마트를 다녀오기로 했다. 오는 길에 좋아하는 버터 프리챌 빵도 사 오자는 기분 좋은 유혹에 수제비 반죽은 좀 더 숙성시키기로 하고 함께 나선다.
남편의 생일에 끓이고 남은 미역을 마저 처리하기 위해 바지락살을 샀고, 운동 후 먹을 요거트와 이번 주 내내 흰쌀밥과 먹고 싶었던 김을 사서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빵집에 들러 버터 프리챌과 콜드 브루 한 잔을 샀다. 비록 비바람에 머리는 귀신처럼 나부꼈지만 나쁘지 않은 길이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고 배고파서 시간을 보니 12시 30분이었다.
12시 30분? 아직 1시가 안 되었다고?
우리 회사의 토요일 근무는 1시까지다. 그 말은 즉슨 원래의 토요일이라면 나는 아직까지도 사무실에 갇혀서 시간을 죽이고 있어야 하는, 심지어 30분이나 더 있어야 한다는 건데 오늘의 나는 아침부터 정말 많은 일을 했음에도 1시를 넘기지 못했다는 짜릿함이 가슴에 번졌다.
밑반찬을 두 개나 만들고, 화장실 청소에 설거지 두 번에 장까지 보고 들어왔는데 아직 퇴근 전이라니. 정말이지 사무실에서 나는 얼마의 시간을 담보로 잡혀 살고 있는 걸까. 또 나의 살림적 재능을 회사 인간에게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환산하며 살고 있는 걸까?
아, 일단 이런 철학적인 생각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밥 먹고 나서 해야지.
숙성시킨 수제비 반죽이 제법 도톰해지고 탄력이 생겼다. 끓는 육수 팩을 건져내 그 위에 하나씩 뜯는 수제비의 쫄깃함이 두 손가락을 스치고 호박을 툭툭 썰어 넣어 간장과 참치액젓으로 간을 맞춘 다음 송송 썰은 대파를 푹 넣고 한소끔 더 끓였다. 물론 일련의 이 과정 동안 마트에서 사 온 대파 7대를 씻고 쫑쫑쫑 썰어 통에 넣어 얼려 놓는 일을 깜빡하지 않는다. 훗 바로 이런 게 주부의 일, 살림의 업무지. 멀티로 움직이는 것. 타샤 튜더는 잼을 졸이면서도 셰익스피어의 책을 읽을 수 있는 주부의 직업이 좋았다는데, 그 뿌듯함이 뭔지 확실히 알겠다.
아빠가 담근 제2의 백종원표 고추장아찌를 곁들여 수제비를 호로록 먹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타서 버터 프리챌과 먹는 오후 2시 30분. 1시에 병원을 나서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집에 오면 2시에서 2시 반 사이, 한 것도 없이 지쳐 오는 길 분식집에서 쫄면이나 김밥 한 줄을 사서 텔레비전 보며 먹다 잠깐 꾸벅 졸면 저녁이다. 한동안 이런 토요일을 보내다 알차디 알찬 살림의 시간을 보낸 오늘이 너무도 길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소중한 시간을 이렇게나 야무지게 쓸 수 있는데 도대체 회사에서 나는 무얼 한다고 시간을 죽이고 있단 죄책감에 쫓기는 걸까.
가능한 멀티플레이어로 살아가는 삶이 내게 주어진 일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콩나물을 무치면서 된장찌개 간을 맞추고, 세탁기를 돌려놓고 걸레를 빨아 거실 바닥을 닦는 일의 루틴을 몸에 익히는 주부인 동시에 듀얼 모니터를 보며 한쪽에는 엑셀 작업을, 다른 한쪽에는 결재 기안을 쓰는 직장인으로서의 나. 한동안 월급의 노예로 살아가는 인생에 초점을 맞추었다. ‘돈 버니까 오늘은 배달시켜 먹어야지’ ‘월급 받으니까 옷도 좀 사야지’ ‘이 정도 돈 버는데 명품 지갑 하나쯤 사면 안 돼?’ 이런 식으로 회사에서 버틴 시간 값을 어떻게든 보상을 받으려고 했는데 얼마 전 6개월 동안 모은 돈이 겨우 300만 원이라는 데서 큰 충격을 받아 큰 우울감에 빠졌었다.
‘도대체 나는 뭐하는 사람인 거냐. 살림하면서 돈 관리도 제대로 안 하고 멋대로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엉망진창으로 살았다’는 성적표를 받은 기분이었다. 많이 버는 것도 아니면서 잘 산다고 온갖 척은 다 하고 싶었나 보다. 마음이 허해서, 내 마음의 중심을 빠뜨려서일 거란 자기 합리화도 살짝 해봤지만 이미 늦었단 생각이 든다. 그나마 다행인 건 토요일 하루 동안 아프다는 핑계로 미뤄뒀던 일을 하고 나니 비로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허풍이 슬쩍 들어 올려지면서 균형이 맞춰지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산다는 건 이런 거였는데.. 아무리 피곤해도 햇반만 돌리면 뜨끈한 밥에 김을 올려 먹거나, 짭조름한 진미채로 한 그릇 뚝딱 먹을 수 있는걸, 굳이 오늘 수고한 나에게 상을 주겠다고 배민 어플을 켰던 나 자신이 보였다. 그 수고가 뭐라고, 나만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우쭐거렸을까. 고단한 육체노동을 하는 것도, 고도의 정신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것도 아니면서 단지 돈을 번단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귀찮음을 돈으로 해결하려 했다. 심지어 부모님께 전화 한 통보단 생일날 드리는 용돈으로 생색을 내기까지 했으니(그렇다고 뭐 100만 원 드리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살림은 확실히 나를 돌보는 일이다. 쓰레기를 치우고, 묵은 곰팡이를 닦아내고, 어질러진 접시를 정리하면 내 머릿속에 해결되지 않은 몇몇의 욕심과 마주할 수 있다. 이렇게 옷이 많은데 또 뭘 산다고, 쓰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산 물건을 바라보며 자책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책망하는 시간 대신 괜찮아, 앞으로 조심하면 된다고 다독거릴 줄 아는 아량도 생기는 것 또한 살림 덕분이다. 더러우면 닦고, 배고프면 만들고, 필요하면 찾으면 되는 단순한 일상이 모든 것을 너그럽게 용서한다. 눈앞에 있는 것들을 치우면 머리와 마음이 개운해지는 일. 이런 일을 통해 사회인으로서 치우쳐진 무게를 생활인으로 균형을 맞추고, 살림 감각을 삶의 감각으로 넓힐 줄 아는 어른으로 만든다. 마치 엑셀이나 파워포인트 따위의 직장인의 기술 말고, 정말 밥을 짓고 먹는 등 생존에 필요한 재능을 발견하는 것만 같다.
오늘도 수고한 나, 배민 어플을 켜고 곱창 떡볶이를 찾다가 냉장고에 고이 잠들어 있는 가지와 양파가 떠올라 김치볶음밥으로 메뉴를 바꾼다. 당장의 귀찮음에 지지 말고 수고스럽지만 직접 요리한 밥을 먹고 열심히 일한 오늘의 나를 위로해 보기로 결심한다. 아마 내일은 배민에서 시켜 먹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오늘 저녁만큼은 가능하다면 내가 밥을 차려 보기로. 내일 할 수도 있는 일을 오늘 해보자는 마음. 치즈 품은 김치볶음밥에 든든한 진미채 하나면 모든 것이 완벽하다.
당분간은 회사에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집에 와선 조용히 칼로 양파를 써는 생활의 균형을 되찾야겠다. 나를 지키는. 좀 더 괜찮은 어른이 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