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뜰 Oct 11. 2021

샤넬 가방은 없어도 샤넬 책은 있습니다.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다이어리에 “물욕 좀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적었다.


내 손으로 썼지만 뭔가 이상해 가만히 들여다보고선 그 글자 위에 두 줄을 쓱 긋고 나서 다시 적었다.


“그냥 돈 좀 작작 써라”


벌써 10월. 2021년도 이제 세 달 남짓 남았다.

곧 단풍이 들고 코끝이 시리다가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는 날이 올 거라니. 이쯤 되면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자괴감이 몰려온다.


올해 나는 꽤 자잘하고 큰돈을 쓰며 살아왔다. 행복을 위한답시고 자기 합리화의 포장으로 조그만 자아를 크게 부풀리는데 힘을 써왔다. 관심도 없던 명품 브랜드를 줄줄이 꿰고 언젠가는 에르메스를 살 거라며 혼자 좋아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또 머릿결도 좋지 않으면서 꼭 이솝 샴푸를 고집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마스크 때문에 향도 잘 못 맡는데 인스타그램에서 유행하는 향수 리스트를 캡처하고 있는 내게 남편은 한심한 듯 물어본다.


“당신 결혼하기 전엔 나이키 신발도 한 번 안 사봤다고 하지 않았어?”


머쓱하지만 맞다. 한참 꾸미기 좋아할 20대의 나는 정작 옷도, 화장품도, 신발도 인터넷에서 가능한 5만 원이 넘지 않는 것들만 사서 썼다. 돈을 아끼는 마음보단 브랜드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고 회사에 다닐 때도 2만 원짜리 호피무늬 백팩에 책이랑 파우치만 넣어 잘 다녔고 지갑도 카드 목걸이 달랑 하나로 몇 년을 잘 썼다. 그렇게 모인 돈이 결국 런던 길거리 바닥에 뿌려졌지만 좋은 경험을 산 것이나 다름없으니 후회도 없다.


문제는 지금, 30대 중반의 나다.

월급도 적은 평범한 직장인이자 주부.


‘나’에 대한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니 이상하게 물욕만 커졌다.


나를 아끼는 일인데 이 정도 샴푸 좀 쓰면 어때?

나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가방 하나 정도는 좋은 거 들어야 하지 않아?

지갑도, 화장품도, 향수도, 목도리도, 안경도, 접시도.... 다 좋은 것. 비싼 것. 있어 보이는 것으로!!




... 어디까지 가려는 걸까?

도대체 뭘 사면 이 허영심과 욕망이 없어질까?


답은 이미 알고 있다. 끝도 없다는 걸.

나는 더 높이, 더 비싼 것을 사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센스가 부족해 남을 따라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을 몰라서 그렇지 알고 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The Making of a Collection CHANEL>


가브리엘 샤넬은 “내가 처음 커스텀 주얼리를 떠올린 이유는 과시와 허세의 시대에 값비싼 귀금속을 대신하는 모조 보석이야말로 가식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샤넬의 머스트 해브요? 체인과 진주요. 진주는 유리 조각이랑 섞어 제작하기도 합니다. 진짜와 가짜를 섞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샤넬 스타일이죠.

샤넬은 시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을 창조해요. 주얼리의 품질과 제작 과정을 존중하는 마음을 컬렉션에 담는다면 무엇이든 샤넬이 되는 마법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칼이 어떤 슈즈를 좋아하는지 알아요.
강한 디자인에 약간 진부한 느낌을 섞는 걸 좋아해요. 이는 세련되고 매력적인 디자인을 위한 특별한 연금술 같은 거예요.


샤넬 가방을 사고 싶어 안달이 났던 여름, 나는 샤넬백 대신 샤넬 책을 샀다. 예쁜 일러스트와 샤넬의 컬렉션 과정이란 이야기가 만난 이 책은 샤넬에서 이뤄지는 모든 제품의 공방 과정, 철학이 담겨 있다. 왠지 우아와 허영이 묘하게 섞인 고급스러운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지만 읽을수록 샤넬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은 의외로 ‘평범함’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반면, 가진 것을 충분히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특별함을 선물하는 곳이 바로 샤넬이라고 책에서는 말한다.


칼은 ‘약간의 진부함’을 섞길 좋아했다. 그 진부함이 정확히 뭘 뜻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에겐 그저 작고 평범해서 오히려 촌스럽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령 생각, 관념, 말, 태도, 물건 등등이 있을 수 있고,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 보는 진부한 것들은 대략 이렇다.


업무를 좀 더 열심히 하기. 아침에 파리바게트에서 빵 사 먹지 말고 집에서 간단하게 토스트에 잼 발라 가기. 읽고 싶은 책은 지역 도서관에 있는지 먼저 검색해 보기. 보석가게 말고 가판대에서 반짝이는 반지 사서 끼기. 아이패드 에어프로 검색하지 말고 지금 있는 아이폰에서 자주 글 쓰기 등등등.


얼핏 청승처럼 보이는 그저 그런 일들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또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샤넬의 로고만 봐도 가슴 뛰는 사람이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늘 오픈런이 화제가 될 만큼 물건이 없어서 못 판다는 샤넬의 가치를 우리는 어떻게 다루고 있는 건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명품이 명품인 이유는 장인들의 수작업에서 이뤄지는 느림의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기계는 단 20분 만에 가능한 일을, 수작업으로 샤넬 장갑을 만들려면 두 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사려는 명품은 장인들의 시간과 영감과 노고와 고집을 함께 사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샤넬이 다시 보인다. 허영과 허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모든 사람들의 끝없는 탐구와 노력도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 더블 C마크가 새긴 가방을 탐하는 것인지 모른다고.



그러니 무조건 좋은 것, 새 것, 비싼 것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샤넬 가방도 그렇게 되려면 무수히 많은 과정을 거치는데 이런 나라고 비싼 것으로 좋은 사람이 되겠는가.


레진으로 코팅된 작은 블레이드를 가진 작업자가 가방 안팎을 뒤집어 솔기를 숨기고, 모양을 잡고, 둥근 가장자리를 대칭으로 만든다. 그런 다음 안감을 넣고, 포인츠 드 브라이드 스티치를 넣고, 작은 구멍을 고치고, 장식을 추가하는 과정이 뒤따른다.
사실 이건 정말 쉽게 요약된 설명이다.
샤넬 핸드백은 180개의 단계를 거쳐 탄생하는, 장인 정신의 정점에 서 있다!


 나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방법이 꼭 좋은 취향을 고집하란 것은 아니다. 다른 것 다 내 마음대로 못 하는데 향수 하나 비싼 거 쓰면 어떠냐고? 물론 맞는 말이지만 점심에 간절한 스타벅스 아이스 바닐라 라테가 오늘 하루를 버티게 하는 소중한 것이 될 수 있고, 좋은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내 자신을 당당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매일, 매번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특별하고 유일한 일로 대체되면 아마 우리는 그 어떤 걸로도 충분하단 마음을 영원히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믿어야 할 것은 ‘충분히 지금 있는 것들로 나를 위로할 수 있다’는 마음이니까.


그동안 하나둘씩 사 모은 것들이 소우주를 이루었다. 그 안에는 나의 부족한 자존감도 있고 그걸 덮기 위한 허영도 있고, 가끔씩 엿보이는 단단한 자아도 있다. 아직도 수행이 부족해 모든 만물에게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아니다’ 싶은 일엔 스스로 점검해보는 자세를 챙겼다.

그래서 당분간은 나를 위한 그저 그런 일을 많이 만들어 볼 것이다. 특별하지 않고 진부하고 진부한 일을.



뭐 물론, 가장 확실한 처방은 남편의 말에 있었지만.

“그냥 인스타그램 좀 끊어”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도 수고한 나, 배민 말고 밥 먹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