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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Oct 17. 2021

하얗고 뽀얀 나의 진도 아가씨

진아는 ‘진도 아가씨’의 줄임말이다. 처음 본 진아는 도련님 품에 안겨 하얗고 통통한 엉덩이를 씰룩대며 우리 집구석구석을 불안한 눈빛으로 돌아다녔다.


“새끼 강아지라더니.. 생각보다 크네요…?”

“그 주인아주머니가 태어난 지 한 달 반 됐다고 하셨는데… 좀 크죠??”


30년 넘게 강아지는 한 번도 키워본 적이 없어 남편이 퇴근 후 올 때까지만 도련님이 계셔주시길 부탁드렸다. 자꾸만 내 곁으로 오는 진아를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귀여운 엉덩이 한 번을 쓰다듬지 못했다.


진아는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가는 친정부모님을 위해 시어머님 친구분께 받아온 강아지였다. 처음에는 집을 잘 지켜달라고 데려온 강아지였는데 지금은 우리가 진아를 지켜주고 있을 정도로 온 가족의 무한 귀여움을 받고 있다.


진돗개 혈통이라고 해서 진아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름이 무색하게 아기 때 접힌 귀는 여전히 펴지질 않고 귀여운 모습을 그대로 남기고 컸다.


처음 우리 집에서 일주일 정도 키울 때 진아는 내가 사람들이 먹는 우유를 잘못 준 바람에 엄청 고생을 했다. 며칠 동안 계속 설사를 하는데 그 와중 기특하게도 몸에 힘이 없어 축 처진 엉덩이를 이끌고 터덜터덜 화장실로 가 용변을 봤다. 남편과 나는 그런 진아에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서 부족하지만 열심히 황탯국을 끓여 주고 약도 열심히 먹였다. 한 3일 고생을 하더니 마지막으로 기생충을 입으로 토하고 진아는 엄청 발랄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출근을 하면 나와 진아만 집에 남았다. 정말이지 사람이 아닌 생명체와 단 둘만 있어본 적이 없어 난 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밥 먹으러 부엌에 가면 그리로 졸졸 쫓아오고, 청소하려고 청소기를 밀면 무서운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그 녀석을 귀엽게 보기만 했지 먼저 다가가서 안아주거나 같이 놀아주지 못했다. 그러면 진아는 현관에서 슬리퍼 하나를 입에 물어와 혼자 뜯으며 놀았다. 안 된다고 하면 ‘왕’ 짖기도 할 줄 녀석이라서 겁을 먹고 소파 위에 덜덜 떨며 앉아 있던 건 나였지만… 그래도 꼭 졸릴 때면 내 다리 사이에 파고들어 귀엽게 고개를 받치고 자는 녀석이었고, 잠시라도 내가 화장실에 가면 문 앞에서 충성스럽게 기다리고 있던 진아였다.


진아는 일주일 뒤 친정부모님 댁으로 내려갔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편이 서열 1위, 나는 꼴찌로 사랑을 받고 있다. 두 달에 한 번씩밖에 못 봐도 멀리서 우리 차만 보면 가만히 응시하면서 꼬리를 흔들고 귀가 뒤로 발라당 까지는 진아. 그런 아이에게 나는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취업이 안 돼서 고민이었던 일도, 남편도 모르는 나의 외로움도, 부모님의 건강이 걱정돼 잘 지켜달라는 말까지. 엄마의 암 수술로 불안했던 날에도 진아를 꼭 안고 다 잘 될 거라고 주문을 외우듯 속삭였다. 그럴 때면 진아는 꼭 사람처럼 나를 쳐다봤다. 정말 내 마음을 다 안다는 것처럼.


진아는 내게 특별한 친구 이상이다. 사람 말고 처음 사귄 생물체의 강아지이고 우리 부모님에겐 내가 하지 못했던 효도를 다 하고 있는 둘째 딸이다.


고운 하얀 털 사이에 숨겨 놓은 작은 심장을 가만히 만지고 있으면 비로소 생명이라는 게 눈앞에 존재한다는 걸 느낀다.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거구나. 살아있다는 건 이런 거구나’


나름 훈육을 한답시고 열심히 유튜브로 공부도 해보지만 귀여운 혀를 쏙 내밀고 해맑게 웃고 있는 진아를 보고 있노라면 ‘무한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몸으로 느낀다. 모든 관계에 지쳐 뭐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았던 내가 유일하게 아무 조건 없이 가깝게 다가가는 아이. 그 아이가 싫다고 해도 정말로 마음 하나 안 다치고 내 사랑을 마음껏 줄 수 있는 나의 진아.


진아에게 바라는 딱 한 가지는 정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와 앞으로 15년만 함께 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때까지 내가 털어놓는 모든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순진한 얼굴로 듣는 둥 마는 둥 열심히 들어주기를. 그것이 나에겐 더 없는 행복이고 위로니까.


나의 하얀 소녀. 진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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