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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Feb 28. 2019

화장실과 달달한 사탕 왕국

Medium Welldone Writings

  종종 어떤 건물의 화장실에 들어가면 사탕 냄새가 날 때가 있다. 몹시 달짝지근한 냄새다. 아주 달아서 입에 넣는 순간 녹아버릴 것 같은. 냄새에 이끌려 코를 벌름거리다 보면 코 안이 끈적거릴 것만 같은 그런 사탕의 냄새. 물론 방향제의 냄새일 것이다.

  

  재밌는 것은 달달한 냄새가 난다 싶으면 십중팔구 같은 사탕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한 곳의 예외도 없이 모두 그랬다. 서울에서도 대전에서도 심지어 제주도 리조트에서조차. 어쩌면 한 방향제 업체가 시장을 독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화장실 악취를 완전히 압도하는 굉장한 사탕 냄새를 어느 한 업체가 개발해냈고 그것으로 시장의 모든 화장실 방향제 냄새를 제압해버렸다, 라는 이야기.




  원래 화장실 방향제 시장에는 여러 가지 냄새들이 때로는 서로 경합하고 때로는 서로 배워가며 공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아한 차 향기와 풍요로운 캐러멜 향, 새콤한 레몬과 트로피컬 과일향들이 두루 포진한 평화로운 세계였다. 그리고 모든 향기들의 위에는 역사와 전통으로 찬란히 빛나는 꽃 향기가 방향제 왕국의 군주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꽃 향기는 봄에는 아카시아 향으로 여름엔 수국, 가을엔 코스모스 향으로 계절마다 옷을 바꿔가며 노련하게 왕국을 지배했다. 추운 겨울날 차디찬 화장실을 은은하게 채우는 동백 향은 방향제 사(史)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군주의 위엄이었다.

  

  가끔은 막 소독을 끝낸 아침 수영장 냄새와 빛이 들지 않아 약간 퀴퀴하지만 그래도 정겨운 기분이 드는 중학교 도서실 냄새, 막 샴푸를 마치고 보송보송해진 강아지의 배꼽 냄새 같은 이단아들이 등장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제법 새롭지만 크게 위협은 못 되는 어리숙한 신성들. 왕은 그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며 점잖게 허허 웃고 거드름을 피우곤 했더랬다.

  


  그리고 어느 날, 달달한 사탕 냄새가 나타났다.

  

  사탕 냄새는 그동안의 신성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파괴력으로 시장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라벤더도 레몬도 그 앞에선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마케팅 조사'라는 금단의 비기 끝에 탄생한 달짝지근한 사탕 냄새는 어떤 지독한 화장실 냄새도 효과적으로 죽여가며 시장을 잠식했다. 흔들의자 따위에 앉아 의심쩍은 눈빛으로 지켜보던 꽃 향기가 화들짝 놀라 무거운 몸을 일으켰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사계절 옷을 갈아입던 절대군주는 애니타임, 애니웨어(any time, anywhere) 원 앤 온리로 뿜어대는 사탕 냄새 앞에서 무참히 스러졌다. 시장은 사탕 냄새가 점령했고 왕국은 '달달한 사탕 왕국'으로 깃발을 새로이 했다. 이 날 이후 높다란 빌딩의 화장실들은 예외 없이 모두 달달한 냄새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라는 허구의 이야기를 자주 가는 카페 화장실에서 해보았다.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대부분의 화장실이 사탕 냄새 일색이라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다. 다양성이 사라지면 세상은 재미없어진다. 아무리 총천연색의 꽃이어도 그것 하나뿐이라면 세계는 무채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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