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라디오
불을 켜지 않아도 어딘지 알 수 있었다. 구석구석 잘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략적인 구조도 색깔도 대체적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어디선가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말간 살구빛의 봄볕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물에 잉크가 번져나가듯 빛은 느릿느릿 구석구석으로 새어들었다. 윤곽이 더욱 뚜렷해지고 디테일까지 선명하게 방안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먼지 자욱한 콘솔, 빛바랜 마이크, 노란색 옥스포드 노트 위에 미세하게 금이 간 몸통의 만년필. 책상 위 한쪽 구석엔 여러 번 휘갈겨 쓰인 원고지가 구겨진 채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고 커피 가루가 바닥에 말라붙은 하얀색 머그잔은 등대처럼 책상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금방 돌아올 것처럼 굴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야 겨우 자리로 돌아온 셈이었다. 책상 위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쓸어 잘게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부유하는 먼지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멀리서부터 미세한 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미약하게 울리던 심장 소리가 점점 더 크게 귓가에 울리기 시작했다. 떨리는 가슴으로, 긴장한 손을 겨우 들어 마이크 앞으로, 바싹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거리고 마침내.
아- 아- (마이크를 두드린다) 톡톡. 봄이 되어 인사드립니다. 여기는 지나간 날을 얘기하는 지나간 라디오. 방송을 재개합니다.
(BGM - '출발' by 김동률)
옛날 옛날 한 옛날, '텀블러(TUMBLR)'라는 미국발 SNS가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카프라는 비상한 머리의 21살 앳된 청년이 만든 텀블러는 '트위터보다는 길고 블로그보다는 간결한' 채널을 표방하며 SNS 시장에 신성처럼 등장했습니다. 아주 깔끔한 인터페이스와 대시보드, 사진도 글도 원하는 만큼 편하게 올릴 수 있는 텀블러에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지나간 라디오'는 바로 그 시절, 몇 안되지만 사려 깊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텀블러를 통해 연재되었던 '글로 듣는 라디오'였습니다.
라디오 자키는 그곳에서 음악도 틀고 (음악을 링크 걸 수는 없었지만) 사연도 읽고 (혼자 만들어낸 사연이었지만) 질문에 답도 하면서 (질문은 종종 보내주셨지요) 시답잖은 신변잡기를 풀어내곤 했습니다. 들어주는 이가 많지 않아도 행복했다지요, 호응해주는 박수소리 하나 없어도 라디오 자키는 캄캄한 무대 안을 활보하며 신나게 지나간 라디오를 연재했습니다. 텀블러가 포르노 성 도착자들에게 점령당하기 전까지 말이죠.
데이비드 카프는 모두에게 개방된 SNS를 만들고 싶었답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그런 곳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정치적 신념의 자유, 종교적 표현의 자유, 그리고 성(性)의 자유까지도요. 사람은 자유를 가지면 그 행복을 나누고 싶어 지나 봅니다. 정치색을 물들이고 종교를 포교하는 것처럼요. 기어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적 판타지를 남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고생 노출과 몰래카메라, 오피스텔 1시간 2회 발사에 20만 원 등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을 때, 라디오 자키는 텀블러를 떠났습니다. 텀블러를 떠나던 날, 라디오 자키는 아쉬운 마음에 자꾸 뒤를 돌아보았고 보이는 건 형광색 태그가 달린 스타킹 판매 광고뿐이었습니다.
먼지 쌓인 부스를 뒤로 하고 라디오 자키는 여러 플랫폼을 전전했답니다. 전통의 녹색 블로그도 기웃거려보고 붉은색 노란색 우후죽순 생겨나는 블로그에 불편한 엉덩이를 디밀어도 보았습니다. 사진을 매개로 하는 인기 최고 플랫폼은 콘솔을 깔고 자리를 펴기에는 너무 작았습니다. 몇 자 쓸라치면 빽빽하게 들어차는 좁은 공간을 보며 라디오 자키는 남몰래 한숨을 지었지요. 다시 부스를 열고 콘솔을 깔고 노란 옥소포드 노트를 빽빽이 채워가며 지나간 라디오를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찾은 곳이 이곳, 브런치였습니다. 글을 쓰려면 무려 작가 신청을 통과해야 하는 깐깐함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여기라면 마음 놓고 다시 부스를 열어도 되겠다고, 육욕과 색욕과 여고생 스타킹에 목을 매는 인간들이 기웃거리는 일은 없겠다고 라디오 자키는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오늘이 되었습니다.
(BGM - 'Reset' by 토이)
지나간 라디오는 불특정 다양한 주제에 대해 문장의 틀도 형식도 없이 그저 신나게 얘기하는 공간입니다. 이곳엔 음악도, 사연도 하물며 라디오 자키의 감미로운 목소리도 없지만, 자유로운 주제와 사소한 소재에 대해 힘 쫙 빼고 웃음기 (할 수 있는 한) 가득 밴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브런치에서 다시 시작한 지나간 라디오 '개국 방송'은 여기까지 입니다. 불쑥 다가온 봄날이 금방 지나가기 전에 모두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