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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Mar 26. 2019

#2 그녀, 세상의 끝으로 가자, 하다

내비게이션과 운전하기

  하히호! 달려라, 달려. 바람처럼, 아니 바람조차 멀찌감치 따돌린 채 달리자. 차라리 벼락처럼, 눈 깜짝할 새에 저기 먼 곳으로 꽂히는 벼락처럼 달리자. 핸들에 손을 올리고, 창백한 미녀의 눈빛처럼 밤새 서늘해진 차에 올라, 시동을 걸자. 뜨겁게 토해내는 우렁찬 기함 소리가, 들리고 난 뒤엔 뜨거운 피가, 폭발하는 불꽃이 차의 구석구석까지 열기를 전해줄 테지.


  하히호! 자,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그녀에게 묻자. 꿈꾸던 곳까지 가장 빠르게, 마치 벼락처럼 눈 깜짝할 새에 닿을 수 있도록. 시원하게 쭉 뻗은 직선의 길이었으면 좋겠어. 페달을 꾸욱 밟고 계속 지르밟아도 아무런 방해가 없는 도로가 좋겠어. 깜빡이도 없이 끼어들거나 비상등만 켠 채 들이미는 놈들이 없는 도로로. 이왕이면 통행료는 내지 않는 곳으로.


  자, 그럼 말해봐. 우린 어디로 가야 할까?


  아- 아- (마이크를 두드린다) 톡톡. 여기는 지나간 날을 얘기하는 지나간 라디오. 두 번째 시간입니다.


  (BGM - 'Highway to Hell' by AC/DC)

Gettyimage


  #2. 그녀, 세상의 끝으로 가자, 하다


  19일에 업로드했던 「봄눈 내린 국도를 달리다 - 홍천 여행」 편은 홍천 가는 길의 이야기였습니다. '여행'이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사실은 내비게이션과 반목하며 어렵게 운전한 이야기죠. 순정 내비인 '그녀'는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어딘가 10% 모자란 정보를 알려주는 길라잡이입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죠.


  처음 차를 샀기 때문에 (초보운전이었을 시절의 좌충우돌은 매거진 『세상 사소한 여행기』「제주에 둘이 오다 - 제주 여행」 편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어떤 내비가 좋은지, 내비의 어디까지 말을 듣고 믿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순 고집불통에 더딘 운전을 참지 못하는 몹시 성마른 성격의 소유자였고 저는 그녀의 고분고분한 양이었죠. 시야가 좁아 도로의 흐름은커녕 표지판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는 초보 운전자에게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정신 바짝 차리고 새겨들어야 할 계명과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엄마 아빠의 말이라면 하늘이 무너져도 들어야만 하는 줄 알던 아이에게도 엄빠 말 따위 까짓 거 하는 시기가 오듯 저 역시 초보 티를 벗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그녀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죠. 두 손으로 곱게 받쳐 잡았던 핸들을 왼손으로 건들거리며 쥐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말이 항상 정답은 아님을, 아니 오히려 실시간 업데이트가 이루어지지 않은 정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럴때면 그녀는 종종 도로가 없는 곳, 끊긴 곳, 다른 차들로 꽁꽁 막힌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교차로를 지나쳐서 다른 길로 갈라치면 고집스러운 목소리로 유턴하라고, 더 늦기 전에 유턴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죠. 80km/h 속도 제한을 단속 카메라 앞 3초 전에 가르쳐주기도 하고 새빨간 브레이크등으로 넘실대는 정체 구간으로 이끌어놓고 씩 웃기도 했습니다. 끝도 없이 늦어지는 도착 예정 시간을 보여주면서 말이죠.


  하지만 지금까지도 우리는 제법 잘 어울리는 파트너입니다. 그녀의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는 고집을 피울 때만 아니라면 매일 들어도 괴롭지 않습니다. 가끔 수 갈래로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다급한 듯 낮게 깐 목소리는 섹시하기까지 합니다. 규정 속도 이상으로 밟고 있을 때면 음악 소리를 스스로 낮추고 경고음을 들려주는 사려 깊음도 보여줍니다.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낮추면 그제야 그녀는 안심이 된 듯 다시 음악을 들려주고 저는 칭찬이라도 들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집니다.


  앞으로도 전 계속 그녀와 반목하며 차를 몰 것입니다. 때로는 싸우고 티맵으로 바꾸겠다고 엄포를 놓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세상의 끝 같은 산길로 저를 이끌고는 계속 가자고 재촉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은 그녀의 인도 아래 그녀가 가리키는 대로, 출발할 때 꿈꾸었던 곳으로 기어이 도착할 테죠.


Gettyimage

 



 (BGM - 'Drive' by 청하)


  두 번째 지나간 라디오는 여기까지 입니다. 지나간 라디오는 앞으로도 더욱 사소한 주제와 가급적 맛있는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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