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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Apr 16. 2019

#3 축제가 끝난 뒤 벚꽃길에는

벚꽃 축제 단상

  ......의 길은 조용하고 걷기에 쾌적했다. 타지인들은 아직 이 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외부인들에게 잠식되어버린 다른 길은 더 이상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북적였다. 하나 둘 몰려든 사람들이 길 위를 가득 메웠고 이제는 푸드 트럭까지 인파를 보고 몰려들었다. 길 위에 떨어진 하얀 각설탕을 향해 달려드는 개미 떼처럼 설렘과 흥분으로 쉽게 열리는 지갑을 향해 트럭들이 달려들었다. 닭꼬치와 핫도그와 함박 스테이크 냄새 물씬한 그 길에서는 더 이상 벚꽃 내음을 맡을 수 없었다. 벚나무가 길을 향해 꽃을 활짝 틔웠다 한들, 그곳은 이미 우리의 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길은 아직 그들의 후각에 걸리지 않은 미답의 장소였다. 길을 아는 주민들만 드문드문 올라와 조용하게 산책을 즐겼다. 이곳의 벚나무는 그곳 못지않은 위용으로, 아니 오히려 더욱 멋진 장관으로 우리를 맞았다. 그녀와 나는 손을 잡고 벚나무 그늘 밑을 걸었다. 아찔한 벚꽃 내음 진동하는 가운데 그녀의 하얀 볼이 발그레 꽃을 피웠다.

  

  아- 아- (마이크를 두드린다) 톡톡. 여기는 지나간 날을 얘기하는 지나간 라디오. 세 번째 시간입니다.

  

  (BGM - '나만, 봄' by 볼빨간 사춘기)



  #3. 축제가 끝난 뒤 벚꽃길에는


  벚꽃이 피었다가 졌습니다. 연분홍색 빛을 가지마다 매달고 있던 벚나무들은 이제 꽃잎을 모두 털어버리고 연두색의 작고 초라한 이파리로 바꿔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벚꽃 구경 잘하셨나요?

  

  제가 사는 동네는 무언가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한 듯 길마다 벚나무를 심어놓은 곳입니다. 사람이 오가는 길은 어디나, 강아지들이 깡총거리며 산책하는 길과 차도 옆 가로수길에도 일관되게 벚나무를 심어 놓았습니다. 저녁이면 졸졸거리는 물소리가 들리는 도심형 개천과 시커먼 입을 커다랗게 벌린 인공 호수의 둘레에서도 벚꽃이 피어납니다. 그 호수에선 얼마전, 많이 취한 청년이 발을 헛디뎌 빠져 죽은 일이 있었는데 모두들 까맣게 잊어버린 것인지 서울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더군요. 아직 청년의 원혼이 떠돈다면 벚나무 가지 어딘가에 앉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벚꽃이 동시에 피어나 온 동네에 흐드러진다는 얘기는 바꿔 말하면 한 번에 모두 져버린다는 뜻입니다. 꽃밭처럼 피어났던 동네가 2~3주 정도 짧은 절정을 맞았다가 금세 시들어버리는 것이죠. 마치 한철 장사를 마치고 상인들이 모두 떠나버린 대학교 축제처럼요. 벚나무는 꽃은 참 예쁘지만 이파리를 달고나면 좀 볼품없어진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벚나무도 이 사실을 아는지 봄옷을 벗고 연두색 옷으로 갈아입고 난 뒤엔 어딘가 의기소침한 얼굴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년 봄이 올 때까지, 2~3주의 짧은 절정을 기다리며 약 50주 동안의 지루한 전희를 계속해야 하죠.

  

  아무튼 지난 2~3주간 동네는 온통 시끌벅적했습니다. 특히나 그 호수에서는 벚꽃 축제까지 열렸습니다. 벚나무 가지에는 시시각각 색깔을 바꾸는 오색 전등이 주렁주렁 달렸고 각지에서 달려온 푸드 트럭들은 힙합 음악을 요란하게 틀어놓은 채 봄날 대목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축제 담당자의 아이디어였는지 벚나무 줄기에는 '좋을 때다, 우리', '당신의 마음속, 벚꽃을 피우다'와 같은 의미불명의 글귀들이 내걸렸습니다. 손이 오그라들어 다시 펴질 것 같지 않은 느낌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밑에서 셀카도 찍고 인증샷도 많이 남기더군요. 좋으신가 봅니다, 여러분.

그 호수

 


  

  (BGM -'벚꽃 엔딩' by 버스커 버스커)


  벚꽃은 모두 졌고 축제는 끝이 났습니다. 푸드 트럭들은 이제 밤도깨비 시장이라는 새로운 대목을 찾아 한강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꽃을 보러 찾아왔던 사람들도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곳엔 볼품없는 연두색 옷으로 갈아입은 벚나무 길과 제가 남았죠.


  세 번째 지나간 라디오는 여기까지입니다. 벚꽃은 졌지만 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여름이 찾아오기 전까지 말랑말랑한 봄날을 더욱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 이 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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