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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May 04. 2019

#4 우리가 봄을 제대로 즐길 수 없는 몇 가지 이유

5월과 완벽한 봄

  아주 짜증 날 정도로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색이 점점 진해지고 있는 연두색 가로수 이파리 위로 봄 햇살이 구슬처럼 알알이 떨어졌다. 이파리를 흔들만치 선명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보며 과감히 길 밖으로 나설 수 없는 신세를 한탄했다. 날씨가 맑건 말건 봄이 완연하건 말건 햇빛이 얼마간 여름을 닮기 시작했건 말건 직장인은 얌전히 사무실에 머물러야 했다. 주인이 공을 던져주기 전까진 궁둥이도 들썩일 수 없는 충성스러운 개처럼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박고 앉아 있어야 했다. 햇살이 창을 넘어 사무실 안까지 침범해오더라도, 슬리퍼 바깥으로 내놓은 발가락을 노란 햇빛이 살랑이며 간지럽히더라도,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직장인은 버텨야 했다.

  

  싱숭생숭한 마음 위로 찬물을 한 바가지 부어라.

 

 

  아- 아- (마이크를 두드린다) 톡톡. 사규와 관습이라는 보이지 않는 기둥에 얌전히 매인 개가 인사드립니다. (멍멍) 여기는 지나간 날을 얘기하는 지나간 라디오. 네 번째 시간입니다.

  

  (BGM - '봄이 좋냐??' by 10cm)

  



  #4. 우리가 봄을 제대로 즐길 수 없는 몇 가지 이유

  

  만약에 '봄'이라는 표제어에 사진을 붙일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진다면 지금 길거리를 나가 어디든 찍어도 될 것 같은 완연한 봄입니다. 예전에 '벚꽃이 지면 봄도 끝이 난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웬걸, 이번 봄은 벚꽃이 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정확히 꽃잎들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나풀나풀 떨어지는 벚꽃 잎이 길 위에 내려앉는 순간 햇빛은 봄의 얼굴을 하고 봄비는 소곤거리며 건조한 땅을 적셨습니다. 길 위엔 다 된 밥솥의 김처럼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회사를 나서는 직장인들은 아직 밝은 하늘에 의아해하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자신 있게 외쳐도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 봄이에요.

  

Getty image

  

  하지만 봄이 왔는데 우리는 봄이 가득한 길 위로 발도 제대로 내딛지 못합니다. 돈벌이, 학업, 여러 가지 이유들이 우리의 발목을 단단히 옮아 매고 있으니까요. 복숭아 뼈 위로 창백한 상처를 남길 만큼 단단한 족쇄가 악어 아가리처럼 억세게 꽉 붙든 채 놓아주지 않으니까요. 제 경우엔 밥벌이 입니다만 독자 여러분들도 각자의 족쇄를 가지고 계시겠지요. 이음새가 성기고 헐겁고 만듦새가 집요하고 허술하고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모두는 이 봄의 화창한 햇살 아래로 주저 없이 나갈 수 없는 족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만 있는 건 아닙니다. 심리적인 요인도 있습니다. 마음의 문제인데요, 바로 짧게 왔다 가는 봄에 대한 초조함입니다. 봄은 눈 깜빡할 새에 지나가버릴지 모르는 아주 짧은 계절이라서 우리는 그만 초조함을 먼저 느끼고야 맙니다. 애달픈 마음으로 (평일에 나설 수 없으니) 주말에 할 계획들을 잔뜩 짜 놓곤 하지만, 말해 보세요 어디. 제대로 계획을 실행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손가락을 귀에 대고 듣는 시늉을 하며 잠시 기다리다가) 없으시죠? 많지 않으시죠? 물론 그럴 것입니다. 후회 없이 만족할 만큼 봄을 즐겨왔다면 우리가 이만큼 봄을 기다리고 반길 리가 없습니다. 봄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욕구불만과 결핍으로 허기가 집니다. 봄에 살찌는 사람이 많은 건 우연이 아닌 것이죠. (턱살이 출렁인다)

  

Getty image

  

  투덜대려고 마이크를 잡은 것은 아닙니다. 발목을 붙든 족쇄가 억세면 억셀수록 봄에 대한 마음이 조급하면 할수록 우리는 가능성이 허락하는 한에서 최대한 봄을 즐기도록 노력해야겠죠.

  

  점심을 먹으러 사무실을 나서는 그 짧은 시간에 온 몸으로 봄 햇살을 받아들여 봅시다. 발로 딛는 땅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봄의 열기에 집중해보세요. 6.3인치 액정에서 눈을 들어 제한 없이 뻗어있는 봄의 광경에 취해보세요. 색이라기엔 차라리 빛이랄 수 있는 봄꽃의 파노라마를 두 각막에 새기세요. 봄은 짧게 머물다 갈 테지만 그 기억은 올 한 해 내내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도록이요.

  



  (BGM - '다시, 봄' by 정승환)

  

  완연하고 완벽한 봄의 날씨는 주말 내내 이어진답니다. 다들 조급한 마음 대신 보다 여유로운 자세로 봄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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