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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Jun 26. 2019

#5 여름이 왔다

여름의 시작과 여름 날씨에 대해

  여름은 여름답지 않게, 혹은 더할 나위 없이 여름답게 변덕스러웠다. 오전에 홀린 듯 집 밖으로 나서게 만들었던 금빛 화창한 날씨는 어느 순간 불만에 가득 찬 5살 여자 아이처럼 찌푸둥한 표정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구름은 툭 건드리기만 해도 기나긴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표정으로 씰룩였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리고 다독이는 눈빛으로 가만가만 하늘을 바라보며 집을 나섰다.

  

  아- 아- (마이크를 두드린다) 톡톡. 여름입니다. 살포시 불어오는 이파리의 내음과 뜨끈뜨끈 달궈지기 시작한 여름 공기 속에서 인사드립니다. 여기는 지나간 날을 얘기하는 지나간 라디오.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BGM - '여름아! 부탁해' by 인디고)

  



  #5. 여름이 왔다


  한 달 만에 돌아왔습니다. 지나간 라디오. 절대 월간 연재는 아닌데요, 에피소드 간 간격이 너무 벌어져 버렸습니다. 게으름의 소치라고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당당)

  

  이건 모두 여름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모습이 구렁이 담 넘어가는 모습 뺨치게 자연스러워서 신경이 거기에 모두 홀렸기 때문이죠.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변화하는 계절을 지켜보느라 라디오 부스에 발 디딜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제 탓이 아니에요. (파워당당)

  

Getty Image

  

  여름을 시작하는 변화

  

  여름을 시작하는 변화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한껏 더워진 아스팔트, 가볍고 아슬아슬해진 옷차림, 창가에 들러붙기 시작한 노란 하루살이들(죄송)이 있을 수 있겠죠.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떠올리시나요? 저는 무엇보다 길어진 해를 생각합니다. 이제 떨어질 때가 됐는데, 싶을 때에도 끈질기게 떠 있는 여름 해 말이에요.

  

  얼마 전 퇴근길에 마트에 들려 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것저것 맥주에 육포, 골뱅이 등 주전부리를 잔뜩 사들고 8시가 다 되어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여전히 바깥이 환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습니다. 마치 아침과도 같았다,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집에 들어가지 말고 차를 돌려 어디론가 가보고 싶다, 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름 해에는 '끈질기다'는 특징 외에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갑작스럽다'라는 점이죠. 어느 날 문득 봄 해(발음이 좀 어색하네요)를 밀어내고 불쑥 찾아온다는 점도 그렇지만 아침에 뜨고 밤에 지는 것도 좀 갑작스럽게 움직이는 구석이 있습니다. 제게는 여름 아침의 여명과 여름 저녁 노을에 대한 이미지가 없어요. 한 번도 본 적이 없진 않겠지만 희미하고 흐릿한 이미지입니다. 겨울 아침의 동이 터오는 모습이나 가을 저녁 황금빛 노을이 지는 모습은 쉽사리 떠올릴 수 있는데 말이죠. 여름 해는 왠지 딱 부러지는 이름만큼이나 에너지 넘치게 움직이는 모양입니다. 에티켓도 없이 여기 불쑥, 저기 불쑥, 놀라는 사람은 생각도 않고 말이죠.  

  

Getty Image


  날씨 이야기

  

  여름 날씨에 대해서도 좀 이야기해볼까요? 저는 날씨 하나에도 이랬다 저랬다 기분이 휙휙 바뀌는 인간이라(이를테면 기분파라) 날씨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일기를 쓸 때에도 글을 쓸 때에도 날씨로 문장을 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기의 경우에는 정도가 심각해서 '오늘은 날이 흐리다', '비가 왔다', '잠결에 천둥을 들었다'로 시작하는 일기가 대다수입니다. 완전 초등학생 방학숙제 같죠. 오늘의 날씨를 따로 기입해도 될 정도이니까.

  

  날씨에 집착하는 이유는 기분도 기분이지만 컨디션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비가 오면 무릎이 쑤셔, 하는 정도는 '아직' 아닙니다만 하늘이 우중충하고 찌푸리고 있을 땐 일의 능률도 시간의 효율도 크게 떨어져 버립니다. 왠지 오늘따라 일은 안 하고 좀 토라져 있을 땐 전부 날씨 때문이에요.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제 매거진 『미디엄 웰던하게 글쓰기』의 '여름휴가 계획, 이대로 괜찮습니까?' 에서 올해는 환절기도 거의 없이 여름이 와버렸다고 썼는데요, 요즘 특히 이번 주 날씨를 보면 때늦은 환절기가 별안간 찾아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화창함을 넘어 화려하기까지 했던 여름 햇살은 온데간데없고 희여 멀건 한 하늘이 무덤덤하게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너무 자주 빨아서 때가 빠지지 않는 행주 같은 색깔의 구름만이 우울한 모양으로 떠 있습니다. 일을 할 기분이 아니네요, 정말. (구시렁구시렁)

  



  (BGM - '여름밤에 우린' by 스탠딩 에그)

  

  지나간 라디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주말부터는 잔뜩 찌푸린 날씨를 넘어 올 여름 첫 장마비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주말에 여행을 가기로 한 저는 부디 예보가 틀렸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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