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na Apr 26. 2019

퇴사를 하고 돌아온  나의 작은 숲에서

in my little forest

오랫동안 쉼 없이 다녔던 회사를 퇴사하고 벌써 1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퇴사 후 넘치는 시간 속에서 나는 매실청을 담그고, 체질에 맞는 잡곡밥을 지어먹고, 여러 종류의 국과 찌개를 끓이고, 손님을 초대하고, 누룩을 사다가 쌀누룩 요거트도 만들고, 나름의 퇴사 후 소박한 버킷리스트에 해당했던 매실청, 레몬청, 모과차, 유자차까지 만들었다.   


퇴사 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퇴사하니 어떠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나는


내가 먹고 싶은 재료로
내 손으로 밥을 해 먹을 수 있어 좋다


라고 누군가에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지금 보니 어쩌면 참 엉뚱해 보이는 대답 같기도 하다. 보통은 출근 생각 없이 마음껏 잘 수 있어서 좋다던가, 평일에 영화를 보러 갈 수 있어서 좋다던가, 그런 대답을 할 것 같은데.



그때는 그저 내가 퇴사한 직후 하던 일들 중 좋았던 것 하나를 무심코 답했던 것인데, 그것이 나에게 1년 넘게 현실이 되었다.


마음에 크게 나버린 구멍을, 내가 직접 나를 위해 만든 밥을 먹으면서 하나하나 메워가고 점차 배가 불러오고 노곤해지는 그런 일상생활의 시간을 1년 동안 보낸 것 같다.


돌이켜보니 그런 대답을 했던 내 안에는 허기가 가득했다.



그것은 마음의 허기였다.

늘 밥을 먹고 있지만 밥을 먹은 것 같지 않은,

마음의 배고픔.

요리했던 소소한 음식들
발렌타인데이에는 수제 초콜릿도 만들어보고
매실청도 만들고 가래떡도 구워먹고
손님도 초대하고
이리저리 잘 나를 먹이고 돌보았다. :)


그래서인지 얼마 전 보았던

영화 '리틀 포레스트 한국판’의 앞부분이

무척 공감이 되었다.


주인공은 도시에서 시골집으로 왜 돌아왔냐는

주위의 질문에


배가 고파서 집에 돌아왔다

고 말한다.



영화 '리틀포레스트' 스틸 사진 중


도시생활에 지쳐 고향으로 내려온 그녀가 말한 배고픔,

그리고 저 밥과 요리의 의미가 그녀에게 무엇인지

정말, 진심으로 알 것 같았다.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


퇴사를 하고 나는 인위적으로 깨우는 이 없는 잠을 자고, 그렇게 먹고 쉰 힘으로 강가에 나가서 자전거를 탔고, 노을을 보고 달을 보며 산책을 하고, 한강에서 물 위로 점프하며 뛰어오르는 물고기를 보며 감탄하고, 구멍이 난 옷은 손바느질을 해서 꽤 멋지게 기워내기도 하고, 드림캐쳐를 만들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집을 정리하고, 쓰지 않는 물건을 선물하거나 팔았다.

자전거를 타면서 깊게 만나는 풍경
회사에 있을 때는 마주하지 못했던 풍경들
이런 그림 속으로
이런 풍경 속으로 나도 들어가고
어느새 벚꽃이 피는 계절이 되고
때론 실내에서 운동도 하고
한강에서 자전거를 즐긴다
한강에서도 이런 생존을 위해 각자 필사적인 현장을 목격하기도........;;




나에게는 나를 돌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단기 목적을 향해 달리는 생활에 너무 오래 익숙하다 보니, 내가 대체 목적도 없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싶기도 하고, 벌지 않고 쓰기만 하는 생활에 뭔가 금전적 수입을 벌어들이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마음이 조급한 날도 있었다.


왜 나는 이렇게 쉬어야겠다는 선택을 하였나에 대해서는 그 시간 안에 있을 때에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참 어려운 것 같았고, 오히려 좀 지나고 나니 이렇게 조금씩 정리가 되는 것 같다.



발효의 시간


어느 날인가 그날도 나는 쌀누룩요거트를 만들며 그런 시간을 나에게 주고 있었다. 호흡 길게, 느긋하게 기다려서 만들어내야 하는 슬로푸드인데다 8시간 이상 발효를 해야 하는 과정이다.


생각해보면 그런 호흡으로 무언가를 해본 지가 언제였을까? 늘 To-do list를 매일매일 클리어하면서 숨 가쁘게 일하던 일상을 오랫동안 살다 보니, 서서히 나에게 번아웃의 그림자가 다가오는지도 몰랐었다.


그래서인지 이런 긴 호흡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나에게 꽤 생소하면서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 요거트를 만들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긴 시간 발효를 마친 쌀누룩요거트


잘 발효된 쌀누룩요거트에 무화과를 띄워서 먹는다



나는 떠난 것이 아니라 나의 자리로 돌아왔다.

가장 나다운 내가 되기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으로.



이 모든 시간의 결말은 아직 모르겠지만, 꼭 나와야만 할 결말이랄 것이 또 뭐가 있나. 이것 또한 현대사회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강박이 아닐까? 그저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면 될 것인데!     

 


우리의 새로운 집에서 그야말로 무목적한 생활을 해온 그 시간 동안 어느새 이렇게 조금씩 숲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요즘에야 깨닫는다.


 

사람이 세우는 목적만 목적은 아닌 것이다.

 

어떤 큰 목적이 나도 모르는 새 내 삶에 숨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무 계획도 목적도 없는 것 같은 이 부유하는 시간 속에.


 


In my little forest. 나만의 작은 숲에서 남겨보는 첫 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