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넘어서서 그저 나아가기
그림을 그리는 일은 늘 마음 한편에 있던 버킷리스트 내지는 하고 싶은 일 중 하나였다. 잠시 화실을 다니다가도 일이 바쁘면 밀려나고, 몸이 피곤해서 더 멀리 밀려나고, 그렇게 밀려나고 밀려나 저 멀리 안 보이게 된 즈음 나는 쉬게 되었고, 다시 그림을 떠올렸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보태니컬 아트 강좌를 듣기 시작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주로 감정이 심하게 요동칠 때 감정의 해소와 치유의 통로로 그림을 그렸었다. 그럴 때와 달리 이렇게 쉬면서 심신이 비교적 평온한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려고 앉은 날은 늘 종이에 연필을 갖다 대는 순간, 두려움이 자주 올라온다.
첫 밑그림을 그릴 때가 가장 두렵다.
앞에 하얀 백지만 있는 그때!
감정이 강해서 그림을 그릴 때에는 그림으로 터져 나오는 감정을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한 느낌 때문에 그런 온갖 재잘거리는 목소리들이 느껴질 새가 없다.
그러나 평온한 날에는 - 이건 처음 그려보는데, 이 선이 삐끗할 수 있다, 색칠이 엉망일 수도 있다 - 이런 모기만 하거나 혹은 거대한 목소리들이 슬금슬금 올라와 나를 덮치려고 한다.
수정이 거의 불가능하니까! 이런 말도 덧붙여진다.
나같이 가끔 그렸던 사람은 그렇다 쳐도, 아예 늘 컴퓨터 앞에서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과연 어떤지 궁금해서 신랑에게 말했다.
- 나는 백지에 그림 그려야 할 때 두려움이 올라와. 시작할 때 특히... 나만 그런가? ㅠ
- 아니, 나도 늘 두려워. 늘.
- 해보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해야 돼.
- 어. 그냥 하는 거야.
신랑과의 대화는 ‘그렇지만 그냥 해야 돼. 그냥 하는 거야’로 극공감하며 서로 마무리.
과연 그림 그리기만 그럴까? 생각해보면 모든 일들이 그러했다. 그래서 요즘의 그림 그리기는 나에게 늘 삶 속의 무언가의 축소판이다. 각종 내적 소리들은 소리대로 그대로 두고 그저 계속 하기를 연습하는 장이 되어주는 종이 앞.
색연필과 종이 앞에서 끊임없이 해나가며 어느 순간 아무 생각 없이 몰입하는 그런 연습을 해가나는 한 장 한 장. 그러다 보면 투덜대고 자책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는 또 다른 나의 목소리는 점점 들리지 않게 된다.
우리는 때로 두렵지만
계속 나아간다.
올라오는 소리는 소리대로 두고
그저 하던 일을 계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