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어디로 데려가는 게냐

7n세 이모들과 떠나는 해외여행

by 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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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Kyle Glenn


우리 가족이 해외 여행을 떠날 때마다 행하는 나만의 유구한 전통이 있다.

앞서 밝혔듯이 P인 나는 비행기 표를 여행 가기 하루 전날 구입하기도 하고, 러시아 항공에 아무것도 모르고 덜컥 올라탄 다음 무사히 랜딩한 승객들이 박수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해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MBTI가 내 모든 것을 대변해 줄 수는 없는 법.

가족들과의 여행, 그것도 내가 가이드 역할을 해야 하는 여행에 즉흥성이란 최소한도로 발휘해야 하는 법이다.


내 컴퓨터 안에는 지금껏 다닌 여행과 관련된 파일만 담겨 있는 폴더가 하나 있다.

18년도 아빠의 환갑 여행부터 올해 다녀온 엄마의 환갑 여행까지, 나의 모든 가족 여행 플랜이 그 안에 담겨 있다.

그리고 더불어 그 여행의 가이드북 역시 함께 존재한다.


가이드북이라고 별로 거창한 건 아니다.

몇 시 비행기를 탈 건지, 어디를 들릴 건지, 뭘 먹을 건지, 숙소는 어떤 곳인지.

그리고 추가로 챙기면 좋을 준비물과 방문할 나라의 간단한 회화 몇 마디를 넣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가이드북을 만들게 된 건 나의 완벽주의 때문이었다.

아빠의 환갑 때 처음으로 가족 여행 계획을 맡은 나는 조금 흥분 상태였다. 한 치의 문제도 발생하지 않고 완벽한 여행을 해내고 싶다는 욕심으로 충만했었다.

그래서 내가 정말 전문 가이드라도 되는 줄 알고 열심히 여행 준비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하필 그때의 내겐 몰두하고 있는 취미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책을 만드는 것이었다.

중철본을 만들기 위한 편집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학부 때 서지학개론에서 배운 '오침안정법' 역시 나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몇 페이지 되지 않으니 굳이 인쇄소에 맡길 것 없이 프린터기만 있어도 충분할뿐더러 제본 방식까지 알고 있으니 그야말로 가이드북을 만들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빛을 바란 완벽주의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며 가이드북의 형태 역시 조금씩 간소화되었다.

제본 역시 수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필연적으로 접히는 부분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 오침안정법 대신 현대의 실 제본 방식을 택하고 있다. (바느질을 잘 못해 난항을 겪고 있긴 하다)

그리고 많은 정보를 제공하겠답시고 수많은 텍스트로 가이드북을 채워 넣는 건 금물이다.

커다란 글씨와 간결한 문장. 거기에 컬러 이미지가 포함되면 금상첨화다. 어른들이 알고 싶은 건 딱 그 정도다.


위에서 밝혔듯 더 이상 완벽주의자이지 못한 나는 사실 가이드북 만드는 것이 조금 귀찮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매 여행마다 꾸준히 만드는 이유는 그게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뿐더러 일전에 들은 작은 이모의 말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젊은 애들이 놀러 가자고 하면 어디에 뭐 하러 가는지 알고 싶은데, 그냥 차를 타고 데려다주는 데로 갈 수밖에 없으니 재미가 없다고 말이다.


내가 여행 전 가이드북을 만들어 건네면 호기심 많은 우리 작은 이모는 그걸 몇 번씩 들여다보시고, 간단한 회화말도 따라 읽어본다. 점잖은 우리 큰 이모도 처음부터 끝까지 쭉 정독하신다.

그리고 여행지에도 그 가이드북을 가져와 오늘은 무얼 하는지, 내일은 어딜 가는지 꼼꼼히 살펴보신다.

가이드북을 통해 배운 회화도 한 번 써먹어보고, 예약한 음식점에 가서 무얼 먹을지 메뉴도 미리 생각해 본다.


뭐든 모르고 보는 것과 알고 보는 것이 다른 법이다.

여전히 기도하는 소리로 가득한 기내 안에서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나지만, 우리 이모들에겐 아시아나에선 일본 가는 그 찰나에도 기내식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려 줄 것이다.

내가 이모들을 위해 몇 번의 가이드북을 더 만들게 될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쭉 그럴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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