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산업화는 기존 가치들에 대한 믿음을 흔들리게 만든다. 과학 기술의 발전, 인간 가치의 폄하…. 가장 흔들린 제반의 믿음은 아마도 기독교적 가치였을 것이다. 세상을 지배한 이념이 흔들리자 세상은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던 셈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 시기에 태어나 학문을 접한다.
『즐거운 학문』에서는 ‘광인의 우화’가 등장한다. 광인은 시장 바닥에서 실종된 ‘신’을 찾아다니고, 시장 사람들은 이러한 광인을 비웃는다. 우리 모두의 존재와 삶의 길을 담지하던 신이 사라졌는데, 어찌 비웃을 수가 있는가? 니체는 이 시대의 신이 이미 죽음을 맞이했고, 사람들은 이미 이에 대한 각각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다. 여전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거나, 신의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정향성을 상실하거나, 신이 죽은 뒤에 또 다른 우상을 세우는 등의 입장이 그것들이다. 이 점에서 논자는 니체의 비판이 독실한 기독교인들을 향해있지 않다고 본다. 되려 ‘신’을 하나의 도피처로, 꿈꾸는 피안으로 삼는 이들, 또 다른 유토피아를 망상하는 이들을 향해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신의 죽음’에 무너지지 않았다고 믿거나, 어중간한 태도로 ‘신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반신반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키에르케고어와 같은 아주 독실한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산업화/과학화 시대로 인한 ‘신의 죽음’이란 시대는 ‘허무를 향해 무너진/무너질’ 사람들의 시대이다. 니체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헛된 초월적,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다가 무너진 이들에게, 또 다른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그 허무에서 벗어나 필연적인 고통까지 포함하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도록’.
논자는 니체의 사상 발전이 ‘진단->비판->명령’의 구도로 진행된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진단은 ‘신이 죽고, 사람들이 허무주의에 빠진 것’이며, 비판은 ‘그리되도록 허상인 피안의 세계를 역설했던 플라톤주의와 칸트, 그리고 기독교 전통’을 향하고 있고, 명령은 ‘힘에의 의지가 충만한 세상에 따라, 일말의 고통까지 포함한 세상 전체를 긍정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니체의 철학은 파괴적인 철학이 아닌, 회복과 재건의 철학인 것이다.
2.
니체가 비판하는 전통 철학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플라톤적으로 기술된 소크라테스 이래의 ‘주지주의 철학’, 그리고 그로부터 완성된 기독교적 사상. 이 흐름 속에서도 특히 소크라테스(정확히는 플라톤)와 칸트를 비판하고 있으며, 이것들로 인해 근거 지워진 ‘기독교’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요컨대 ‘이분법적 세계관’의 사상들이다. 지식과 행위도, 이데아와 그 그림자인 이 세계도, 현상계와 예지계(물자체)도, 고통스럽게 추방당한 곳인 이 땅과 드높은 피안의 세계(천국)도 모두 이분법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사유전통이 주류를 형성하여 인간들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긍정하지 못하고, 내세, 피안의 세계를 좇는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이분법적 세계, 그것도 우리의 살갗에 느껴지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상정하는 것은 허구이다. 성욕, 수면욕처럼 모든 것이 의지의 발현, 구체적으로는 힘에의 의지의 발현이다. 지식에 대한 욕구도, 이에 따르는 피안의 세계를 알고자 하는 욕구도, 자유의지와 도덕법칙을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자유의지론과 도덕법칙, 그리고 기독교의 윤리는 그에 따르는 인간들을 ‘지배’하려는 힘에의 의지의 결과물일 뿐, 결코 사실이나 진리를 고하고 있지 않다. 니체는 이 이분법적 세계의 허상을 파괴한다. 칸트의 언어를 빌리자면, 생성과 소멸이 반복하는, 고통이 잇따르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 현상계만이 진정한 세계이며 이것은 ‘힘에의 의지’에 따르고 있을 뿐이다.
3.
논자가 보기에 니체가 쇼펜하우어에게 받은 큰 영향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1) ‘의지’ 개념. 세계는 ‘의지’와 ‘표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 삶의 근본 동기는 ‘의지’이며, 이 의지의 충동이 분출되는 것이 삶의 진행이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맹목적 의지’ 개념에 대상/목적을 설정하는 방식으로 발전시킨다. 여기서 설정된 대상/목적은 ‘힘(권력)’이다. 만약 쇼펜하우어의 사유처럼 의지가 맹목적으로 방출된다면, 인간은 자신의 정향성/방향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힘(권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의지가 발현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에 따라 살아간다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고 결코 정향성/방향성을 상실할 일이 없다.
2) 또한 정향성/방향성의 상실은 허무주의(니힐리즘)로 귀결된다. 쇼펜하우어의 니힐리즘은 ‘시대 진단’이 아닌, ‘인간 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의지(욕망)는 끊임없이 발산되기에, 그것을 완전히 만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니힐리즘 개념을, ‘신의 죽음’으로 인해 정향성/방향성을 상실한 인간 사회에 대한 진단으로 승화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는 근본적으로 만족될 수 없는 개념이며, 따라서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염세주의적 태도, 즉 ‘의욕 하기를 멈추는’ 금욕의 태도를 지향해야 한다. 하지만 역으로 니체는 자신의 의지를 ‘올바르게 긍정’하면 니힐리즘을 극복 가능하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정리하자면, 쇼펜하우어는 니체에게 ‘의지’ 개념과 ‘니힐리즘’ 개념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개념의 귀결이 ‘염세’로 향하는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니체는 긍정과 극복의 대상으로 파악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중간고사 관련 답안을 복기해 본 것인데, 기말고사에도 유사한 내용들을 적게 되어서 따로 정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