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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주 엄마 Aug 13. 2021

육아를 할 때 흔히 드는 내적 갈등

'엄마'라는 정체성 vs '나'라는 정체성

육아를 하게 되면 하루 종일 혼자 아기와 대화를 하다 보니 혼자서 한다는 말이 고작


"엄~마~!"

"맘~마!"

"우리 아기 잘 잤어요?"

"기저귀 갈아줄까?"


이런 말밖에 없다...


계속 그렇게 한정된 어휘로 살면서

수유하기-기저귀 갈기-몇 마디 말 걸면서 놀아주기-기저귀 갈기-재우기-기저귀갈기-수유하기


이 코스를 무한 반복하다 보면 머리도 굳는 것 같고, 나의 '자아'라는 것이 점점 사라져 가고 '엄마'만 남는듯한 느낌도 든다.


육아휴직을 하고 난 후, 이렇게 아기와 함께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면서 나의 정체성은 빠르게 '엄마'라는 정체성으로 바뀌어 갔다.


원래 나의 정체성은,


- 내가 하는 일을 더 잘하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고 이 일에서 더 성공하고 싶은.. 내가 가진 직업의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

- 나이가 들어가고 있지만 아직 젊고 아름답고 싶고, 남편에게 여자로서 계속 남고 싶은 '30대 여자'로서의 정체성

- 내가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즐기고, 그 취미생활을 유튜브나 책으로 더욱 발전시켜 무언가 특별하고 개성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는 '크리에이터 지망생'으로서의 정체성

- 퇴근 후 저녁과 주말에 남편과 게임을 하거나 드라마, 넷플릭스를 보면서 빈둥빈둥 놀며 소확행을 즐기는, 그리하여 게으름의 행복을 만끽하는 '그냥 쉬는 자'로서의 정체성  


이런 정체성들이 나를 지배했다면,


아기를 낳은 후의 나는 그냥 '엄마', 아기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자로서의 정체성이 나의 80~90%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의 머리와 나의 시선과 나의 세상은 온통 아기로 뒤덮였다.


하루 종일 나의 눈은 아기의 얼굴과 동작을 뒤쫓고 있었고,

나의 입은 아기에게 거는 말로,

나의 몸놀림 하나하나는 아기를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입히는 데 사용되었다.


아기는 그야말로 나의 세상을 온통 훔쳐갔다.


이렇게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기를 낳기 전에는 두렵기도 했고 싫기도 했다.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봤을 때 대리 체험했던 그 느낌..


딱히 생산적이지 않은 것 같고 무의미해 보이는 육아의 일상에 가라앉아서 사는 삶..


'나'라는 정체성은 없어지고 아기가 빼액 울면 끝없이 달려가서 안고 달래고, 나머지 시간에는 힘들게 가사일을 하고 멍하니 돌아가는 세탁기를 바라보는 그 무기력하고 힘없어 보이던 '엄마'의 모습..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돌아가는 세탁기를 멍하니 바라보던 정유미의 모습은 뇌리에 깊게 남았다.


아기를 낳고 나면 저런 느낌이 들까 싶어서 무서웠다.


그래서 3년 전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아기를 가졌을 때에는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 울었다.


남편에게 등 떠밀려서 아직 출산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너무 쉽게 덜컥 임신을 해버리자 갑자기 현타가 밀려왔다.


아직 30이 넘도록 내 인생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이뤄낸 것도 없고, 그 무언가를 위해 죽도록 노력도 아직 못해본 것 같은데..


아직 '엄마'가 되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도, 도전해 보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이렇게 육아의 늪에 빠지게 된다고??


그때 나는 이제 '나'라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완전히 끝난 것만 같고, 아기에게 온전히 내 인생을 희생할 준비가 아직 안 되었는데 이렇게 엄마가 된다는 게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하늘이 알고 "아직 넌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되었네?"라고 생각을 했는지, 그 아기를 거둬 가셨다.


아기가 심장이 뛰기도 전에 계류유산으로 아기를 잃고 말았다.


아기를 잃고 펑펑 울면서 다음번에 아기를 다시 갖게 된다면 온 마음으로 축복하고 하늘에 감사하고 사랑해주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리고 다시 아기를 갖게 되기까지 2년여간 남편과 상의하여 임신을 조금 미루게 되었다.


그리고 그 2년 동안 나는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 내가 꿈꿔왔던 많은 도전들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발전시켜 출판사와 계약 후 책으로 출간하는 데 성공했고, 

나의 직업적 전문성을 살려 정리한 내용도 책으로 출간했다.

영상편집 기술을 유튜브를 보고 독학해서 각 잡고 대사 쓰고 편집하고 영상을 만들어 구독자를 늘려 나가기도 했다.


방치하고 있던 유튜브 채널이 성장해서 구독자가 수백 명 늘어나고 댓글이 달리고,

내가 쓴 책들이 예스24나 알라딘 같은 인터넷 서점과 우리 동네의 작은 서점 진열대까지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의 평범하고 단조롭던 인생에 반짝이는 등불 하나가 켜진 것 같아서 큰 희열을 느꼈다.


방탈출 마니아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취미생활 도서류 Top100 자리를 꾸준히 지키다가 2쇄 인쇄까지 이어진 나의 첫 발간 책!


비록 그 도전들이 엄청나게 큰 성공을 거두어서 나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는 의미 있는 수입원으로까지 이어진 것은 아니고 소소한 부업 정도의 수입일 뿐이었지만,


수입을 떠나서 나의 온 에너지를 탈탈 털어서 넣고 그 결과를 작게나마 거두는 것을 본 경험은,

본격적인 육아를 시작하기에 앞서 '후회 없는 도전'을 해보았다는 경험으로 남았다.



그래서 두 번째로 다시 아기를 가졌을 때에는 온전히 환영하는 마음으로 지금의 복주를 만날 수 있었다.


더 이상 '나'로서의 정체성에 큰 미련도 남지 않았다.


'엄마'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기를 위해 내 시간과 노동력을 아낌없이 줄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렇게 만난 아기와 육아를 하게 되니 육아가 생각보다 그리 힘들지 않았다.


육체적으로는 엄청 힘들지 몰라도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육아는 앞만 보며 달려온 나에게 있어 하나의 '리프레시'가 되는 느낌도 있었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감, 마감일 전에 업무를, 원고를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


짧은 시간에 휘몰아치면서 집중해서 밤을 새야 했던 나날들...  직장이 끝나고 집에 와서도 새로운 도전을 해본답시고 주말 없이, 저녁 없이 끝없이 일과 집필에 시달렸던 나날들.. 직장에서 사람을 대하는 피로감.. 그곳에서 겪는 온갖 종류의 감정노동..


일이 끝나고 쉬면서도 쉬는 순간을 온전히 즐기기보다는 뭔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가졌던 나날들..


육아휴직을 한 후에는 이런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서 오직 귀엽고 순수한 아기의 해맑은 미소를 바라보며, 내가 사랑하는 아기님을 새로운 보스로 모시는 '엄마'라는 직업이 내게는 차라리 힐링이었다.


아기를 안고 짐볼에 앉아 귀여운 아기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짐볼에 앉아서 바라본 복주

'이렇게 귀여운 아기를 안고 멍 때리면서 아무 생각 없이 하루 종일 있을 수 있다니.. 진짜 좋다.... 일하는 게 힐링이 되는데, 이게 내 현재 일이고 직업이라니 정말 너무 좋은 걸..'



달려라 달려..!


채찍질만 하면서 살아온 인생..


대학에 가기 위해, 원하는 직업을 얻기 위해, 직장에서 업무에 적응하기 위해, 더 일을 잘하기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인연을 만나기 위해, 아파트 대출금을 갚기 위해..


노력 또 노오력을 해야 했던 인생..


무엇인가 성과를 얻지 못하면 곧바로 실패가 되어 버리고는 했던, 거절과 불합격과 스스로를 혼내고 다그치며 끝없는 불안 속에 살아와야 했던 인생..


그런 모든 잡다한 고뇌에서 떠나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내 새끼를 바라보며, 그 아기를 껴안고 잠들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아기와 놀아주는 삶은 그전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평화롭게 반짝이는 행복이었다.


'엄마'라는 정체성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달콤하고 평온했다.


가파른 비탈길을 열심히 오르는 삶만을 살아온 나에게

평평한 길을 느긋하게 걸어가는 듯한 육아의 삶은

"인생이란 이런 거야. 삶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숙하게 들어가서 즐기고 음미하는 거야. 그게 바로 인생이지."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 나희덕, 「속리산에서」



이런 나에게 친정 엄마는, "네가 아기를 낳을 때가 되어서 낳아서 그런 것 같다. 엄마는 너무 어린 나이에 너를 낳다 보니 아직 커리어에 대한 욕심도 많고 꿈도 많은데 그런 모든 게 좌절되는 느낌이라서 육아를 받아들일 때 스트레스가 컸어. 경력 단절에 대한 공포심도 컸고.. 그런데 너는 아기를 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고, 휴직이 끝나고 돌아갈 직장이 있다는 점 때문에 훨씬 행복하게 육아를 할 수 있는 것 같네."라고 말씀하셨다.


엄마의 말처럼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순조롭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 같다.


'나'를 내려놓고 '아기'를 위해 살아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

육아가 끝난 후에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커리어의 입지를 다져놓는 준비(혹은 커리어를 포기하고 온전히 엄마로서 사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

육아에 밀려 할 수 없는 수많은 도전들을 미리 해보며 이런 것들에 대한 미련을 털어내는 준비..


그래서 육아에도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나'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는 못했는지, 가끔은 나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아기가 잠든 새벽에 쓰는 지금과 같은 글쓰기,

따뜻한 욕조에 앉아 기분 좋은 사색 즐기기,

아기가 잠들었을 때 읽고 싶은 책과 웹툰 읽기,

샤워 후에 얼굴에 팩 하기


'엄마'라는 정체성이 너무 커져버렸기 때문에, 작게나마 즐기는 이런 나만의 시간이 육아 전보다 더 재밌고 값지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누릴 수 있었던 '나만의 시간'이었는데, 지금은 정말 어렵게 짬을 내어 가지는 '나만의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


육아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겪는 우울한 감정 중 큰 비중은 자기 계발이나 커리어에 대한 집중, 자신의 취미생활 등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아주 많이 사라져 버리고 그러면서 '나'라는 정체성까지 사라지는 듯한 느낌에 대한 서러움과 그것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엄마'라는 정체성도 해보기 전에는 몰랐던, 생각보다 즐길 만한 행복 포인트가 여러 군데 있으니 잠시 '나'의 정체성을 내려놓고 '엄마'의 정체성을 온전히 즐겨 보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아니 어쩌면 '엄마'라는 정체성은 '나'라는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엄마'라는 틀 안에서도 충분히 행복하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오히려 이전에는 해보지 못했던 경험을 통해 더 많은 감동을 느끼고 더 성숙해진 마음과 더 깊어진 감정의 깊이를 느낄 수 있으니까..



이 세상에 사람과 사람이 서로 미소를 지어주고 웃어주는 것보다 더 의미 있고 행복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


아기의 미소를 통해 잊고 살았던 중요한 가치를 알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 왕자님, 잘 잤어요~?" 말 걸어주면서 기저귀를 갈아주면 씨~익 하고 웃음 지어주는 모습,

씨~익!

늠름하고 의젓한 표정으로 입술은 앙다물고 양팔은 씩씩하게 둥글게 말아 내리고 자는 아기의 모습,

의~젓!

끙끙대면서 안간힘을 쓰다 뒤집기에 성공하는 모습,

뒤집기 하다가 엎어져서 그대로 잠들어버리는 모습,

멀리서 엄마가 다가가면 꺄르륵 자지러지게 웃으며 커다란 미소를 지어주는 모습,

동요를 틀어주면 노래에 맞춰서 몸을 꼼지락꼼지락 하고 손발을 헛둘헛둘 열심히 춤추듯이 움직이는 모습,

젖을 빨 때 양손을 기도하듯이 공손하게 꼭 모으고 있는 모습,

젖을 빨 때면 세차장 고무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힘차게 발을 파닥거리고 온 힘을 다해 젖을 빠는 아기의 모습..


이 모든 귀여운 아기의 모습을 볼 때면

겨울처럼 나른하고 메말랐던 내 삶에도,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우리 아기처럼 푸르고 풋풋한 봄이 온 듯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 우리 아기는 ‘나’라는 늙어가는 나무에 돋은 푸른 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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