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에 좋은 코팅된 귤은 속이 빨리 썩는다. 귤이 호흡할 공간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인간도 자신의 아픔을 진솔하게 드러낼 믿음만 한 분이 있을 때 살아갈 수 있다. 욥은 그렇게 자신의 마음의 환부를 드러낸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계속 묵상하던 중 정신을 잃을 정도의 큰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1:21과 2:10에서 놀라운 신앙을 고백했던 그가 순식간에 돌변해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게 사람이다. 그도 우리처럼 살과 피를 가진 사람, 상처 입기 쉬운 영혼이었다. 욥이 이토록 자기의 상처 입은 영혼을 드러내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고통과 슬픔에 깊이 공감해 준 벗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재산이 스러진 것은 그렇다 쳐도, 생때같은 자식들이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되고, 가깝던 이들조차 낯선 이로 변하고 연민에 찼던 사람들의 시선이 서서히 경멸로 바뀌어 가고, 삶의 전망조차 불투명할 때 자기 생을 무겁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욥은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삶에 닥친 고난으로 생일을 저주하며 곪았던 아픔을 드러낸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욥과 같은 기도를 드렸다.
주님이 원하시는 건 종교적 가식이 아니다. 상한 심령이다. 상한 마음을 주님은 멸시치 않는다.
우리의 목소리가 자음을 잃어버리고 모음만으로 그분 앞에 흐느낄 때도 그분이 들으신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 말씀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원문으로는 파산한자)가 복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천국이 저희 것이고 주님의 위로가 더해진다.